세계일보

검색

화업 외길 50년… “이제 그림 조금 알 것 같아”

입력 : 2016-05-24 20:51:18 수정 : 2016-05-24 20:51:18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경주서 회고전 갖는 전광영 작가 45년 전 미국 유학시절 그린 그림도 내걸렸다. 염색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유대인 직원한테 배운 고급 날염기법을 풀어낸 작업이다. 캔버스에 테이프와 종이를 붙이고 날염안료를 드리핑한 후 떼어내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흔적을 남기는 방식이다. 그 위엔 눈물 자국도 범벅이 됐다. 9월30일까지 경주 우양미술관에서 회고전 성격의 전시를 갖는 전광영(72) 작가가 가장 가슴 아파하는 작품이다.

“눈물을 캔버스에 뚝뚝 흘리며 만든 작품이에요. 삶을 포기할까 했을 정도로 절박한 시간들이었지요. 동양인 외톨이로 부모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열등의식이 저를 삼켜버릴 것만 같았어요. 눈물로 써내려간 작품이지요.”

작업 반세기를 맞은 그는 요즘도 그때 일이 눈에 선하다. 다시 태어나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다시 하라면 여전히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작가의 길은 너무 외로워요. 오죽했으면 신의 형벌을 받은 자들이라고 했을까요.”

한지조형 작업으로 평면과 입체를 넘나들고 있는 전광영 작가. 50년 화업 외길을 걸어 오고 있는 그는 “요즘에서야 그림을 조금은 알 것 같다”고 털어 놓았다.
그는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조영남 대작’ 사건을 접하면서 서글픈 생각이 든다고 했다. 세계 유명 작가와 논리에 맞지 않는 비교로 순수 창작의 세계를 왜곡시키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차원이 다른 얘기를 궤변으로 희석시켜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붓 하나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작가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지난 한 해 외국 전시로 누구보다도 바쁘게 보냈다. 에든버러 페스티벌 전시 초대전(도브콧 스튜디오) 등 세계를 누볐다. 홍콩 펄람갤러리 전시도 그중 하나다, 영국, 미국, 독일, 벨기에 등 6개국의 갤러리에서 그는 전속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20일 우양미술관 전시개막엔 전속 갤러리 괸계자들이 대거 참석했고,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큐레이터의 얼굴도 보였다. 그의 세계적 입지를 엿보게 해줬다.

“70억 인류 중에 독특한 나를 찾아 나온 여정이었습니다. 다른 이와 비슷한 얘기를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는 한동안 서구미술의 차용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영혼을 빌려온 듯한 이질감을 쉽게 떨칠 수가 없었다.

“전국을 떠돌다 우연히 온양민속박물관에 들르게 됐어요. 옛 농기구 등을 바라보고 있자니 당시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나를 짐작할 정도였지요. 20여번째 찾던 어느 날엔가 돌아서 나오는데 등 뒤에서 아낙들의 수다가 환청처럼 들렸지요. 조상들의 삶이 제게 염색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는 조상들의 흔적에서 우리의 얼을 느꼈다. 그것이 자신의 혼처럼 여겨졌다. 고유 한지로 만든 책과 그림, 글씨 등이 구체적인 매체가 됐다. 여기에 보자기 문화를 보탰다.

“보자기는 상자와 달리 물리적 용량을 넘어 또하나를 보태서 쌀 수가 있지요. 거기에는 더 주고 싶은 정이 담겨 있습니다.”

드리핑에서 시작된 그의 회화는 삼각 형태의 스티로폼을 한지로 싸 평면에 구축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입체작업으로도 확장됐다. 회화에서도 우연의 효과이지만 삼각형 이미지들이 이미 드러나고 있었다.

“100여년 전의 고서 종이를 스티로폼을 싸 화면을 구축하는 것은 제겐 고서에 담긴 혼을 한데 모으는 제의 같은 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겐 서양적 조형 요소에 한국의 혼을 불어넣는 작업이었다. 사실 이런 작업들은 처음엔 국내에서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시카고 아트페어 등에서 주목받으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세계 유수 갤러리들에서 러브콜이 이어졌다.

“관훈갤러리 전시 때 지금은 고인이 된 미술평론가 이일씨가 전시장을 찾아오셨어요. 작품을 둘러보시곤 ‘이 놈 일 내겠다’며 흐믓해하셨지요. 그분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저를 인정해 주신 겁니다.”

그는 이때부터 작업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됐다. 안목 있는 평론가가 한 작가를 살린 것이다. 최근작들은 밝고 평면성을 더욱 띠고 있다. 초기 회화를 방불케 한다. 회화작업과 한지조형작업이 한데 어우러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제야 그림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는 앞으로 페인팅 작업도 병행할 계획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