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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루소의 명문은 ‘동심’에서 나왔다

입력 : 2016-06-24 20:56:25 수정 : 2016-06-24 20:5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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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최고 문장가 39인 글쓰기 비결 정리
이덕무, 어린아이가 장난치듯 순수하게
‘양반전’의 박지원은 ‘풍자’라는 요소로
‘걸리버 여행기’ 스위프트는 비유와 상징 활용
한정주 지음/김영사/1만9000원
글쓰기동서대전/한정주 지음/김영사/1만9000원


동서양 최고의 문장가 39인의 글과 삶을 풀어낸 책이다. 선정된 인물들은 인문학이 만개한 18세기 무렵 작가들이다. 이들이 써낸 글은 당대는 물론이고, 현대에 들어서도 등불처럼 밝게 빛나면서 인문학을 이끌고 있다.

18세기 동서양의 글쓰기 공통점은 ‘동심’과 ‘어린아이’였다. 이 같은 ‘소싯적 발상’이 태동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동·서양에서는 전통적인 권력이 해체되고 새로운 문물이 쏟아졌다. 동양에서는 성리학의 정치-문화 권력이, 서양에서는 기독교의 정치-문화 권력이 쇠퇴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조선에서는 성호학파와 북학파가, 중국에서는 이탁오와 공안파가, 서양에서는 루소, 볼테르, 디드로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전통적인 권력을 거부하고 철학과 사상을 새롭게 세우려 했다. 그러기에 그들은 순수하고 개성적이며, 자연스럽게 시대를 풀이하고 해석했다.

18세기를 전후해 조선과 서양, 일본 등에서 나온 사상가와 작가들은 명 문장과 글을 남기면서 사상계를 주름잡았다. 이들이 펼친 인문학과 삶은 오늘날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박지원, 괴테, 루소, 나쓰메 소세키, 이탁오(중국).
조선 후기 동심의 글쓰기를 대표할 만한 인물은 청장관 이덕무이다. 그는 자신의 첫 시문집 제목을 ‘영처고’라 지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치듯이 처녀가 부끄러워하듯이 글을 썼다는 뜻이다. 18세기 이전 조선 문사들의 글쓰기는 ‘목적이 있는 글쓰기’였다. 출세와 부귀를 가져오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덕무의 글쓰기는 자신의 동심에 따르는 글쓰기, 즉 무목적의 글쓰기였다. 천진하고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며 진정성 있게 글을 짓는다면, 좋은 글이 나온다는 것이 이덕무의 신조였다.

18세기 서양에서도 ‘어린아이의 발견’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이전까지 서양에는 ‘어린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루소는 저서 ‘에밀Emile’을 통해 어린아이의 본성을 강조했다. 루소는 “모든 것은 조물주의 손에서 나올 때는 완전하지만 인간의 손에 들어오면 변질되고 만다”고 했다. 루소의 이 책은 현대 교육학을 태동시킨 저서로 인정받고 있다.

풍자라는 요소는 글쓰기의 백미였다. 소설 ‘양반전’의 저자인 박지원과 ‘걸리버 여행기’를 집필한 조너선 스위프트는 ‘풍자’ 작가로 이름을 떨쳤다.

박지원은 청나라를 다녀온 뒤 “장관(베이징)을 말한다면 썩어서 더럽고 냄새나는 똥거름이라고 하겠다”면서도 “(청나라 사람들이) 똥거름을 활용하는 방법만 관찰하더라도 천하의 제도가 바로 세워져 있다는 것을 깨우칠 수 있다”고 썼다. 청나라를 일컬어 오랑캐의 세상이라고 여기는 조선의 선비들을 역설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비유와 상징을 잘 활용했다. 소인국에서 비생산적인 논의를 일삼는 당파들은 모두 영국의 정당을 빗댄 것이었다.

서양쪽 인물로는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와 괴테, 니체, 쇼펜하우어, 니코스 카잔차키스 등이 나온다. 동양의 대표적 문장가로는 조선의 박지원, 박제가, 이익, 중국의 오경재, 서하객,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 요시다 겐코 등이 대표적으로 소개된다.

저자가 18세기를 중심 소재로 삼은 이유는 인문학을 꽃피운 그 시대적 배경 때문이다. 부르주아, 상인, 중인 계층 등이 사회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는 경제 구조적인 대 변화가 있었던 시기였다.

이는 오늘날 인터넷을 통해 지식이 폭발하는 유형과 닮아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시대의 글쓰기는 어떠한가? 이것이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묻고자 하는 핵심적 질문이다. 동심의 글쓰기를 책의 첫머리에 놓은 이유도 개성과 자유, 그리고 자연스러움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비록 구성, 논리, 문법, 형식이 불완전하다 하더라도 속내를 써낸 글이 진짜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는 역시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임금 정조와 토론했다. 당시 정조는 모든 문장을 고문에 맞추라고 명령한다. 이른바 정조의 문체반정이다. 이를 반박하는 박제가의 논리는 이랬다. “만약 세상의 모든 맛을 매실의 신맛에 맞추라고 한다면 온 천하의 맛은 반드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문장도 마찬가지다. 정조의 명령대로 세상의 모든 문장을 순정한 고문에 맞추라고 한다면 이로 인해 온 천하의 문장은 반드시 없어지고 말 것이다.” 과연 용기있는 공직자요 실학자의 태도였다. 임금을 정면에서 반박할 수 있는 당돌하면서도 자유분방함이 당대 분위기였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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