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강대국들 포커판이었던 ‘6·25전쟁’ 국제사적 조망

입력 : 2016-06-24 20:46:43 수정 : 2016-06-25 00:31:07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베른트 슈퇴버 지음/황은미 옮김/여문책/1만7000원
한국전쟁/베른트 슈퇴버 지음/황은미 옮김/여문책/1만7000원


6·25전쟁을 국제 정치학적 시각에서 조망한 책이다. 독일의 젊은 역사학자인 베른트 슈퇴버는 6·25전쟁을 냉전시대 최초의 열전으로 묘사했다. 6·25전쟁은 제1, 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전쟁과 비교해 세상에 덜 알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전쟁사에서 볼 때 훨씬 비극적이었다.

6·25전쟁은 ‘잊힌 전쟁’이 아니라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1991년 냉전이 막을 내린 이후에도 한반도는 여전히 아슬아슬한 휴전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온 소규모 전투, 태업, 위협의 서막에 불과하다.

소련의 스탈린은 전 유럽의 공산화를 목적으로 6·25전쟁을 기획하고 실행했다. 스탈린은 지구 반대편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국이 싸우도록 부추긴 뒤, 동유럽 공산화에 몰두했다.

소련의 꼭두각시였던 김일성은 소련제 탱크와 군수물자를 지원받아 남침, 단숨에 한반도를 삼키려다 미군의 개입으로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당시 중국의 마오쩌둥은 만주 지배를 확실히 할 목적으로 소련의 전투병 파병 요구에 응했다. 6·25전쟁이 끝난 이후 소련은 동유럽 공산화에 성공했고, 중국은 만주를 확실히 차지하면서 소련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중국은 100여만명 장병의 희생을 대가로 값비싼 전리품을 얻은 셈이다.

한국으로선 모든 시설이 거의 파괴되었다. 엄청난 규모의 폭탄과 네이팜탄을 투입해 모든 것을 불태우고 450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다. 그중 거의 3분의 2가 민간인이었다. 한반도 전쟁은 극도로 잔학했다.

6·25전쟁은 냉전 시대를 여는 초강대국들의 포커게임이었다. 구체적으로 민주, 공산 양대 초강대국의 군비경쟁은 이미 1946년 말에서 1947년 초에 시작되었다. 소련은 1차 베를린 위기를 조장했고, 이에 대응한 미국은 엄청난 군비 증강에 몰두했다. 공산주의를 몰아낸다는 명분 뒤에는 미국 내 군산복합체의 이권이 있었다.

6·25전쟁은 한반도는 물론, 냉전시대로 향하는 변곡점이었다. 무엇보다 미국 대선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은 세계 최강의 패권국가로 등극했다. 서독과 일본은 6·25전쟁으로 경제적 부흥을 톡톡히 맛보았다. 이 전쟁은 국제적 냉전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고, 군비경쟁을 가속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저자는 6·25전쟁을 포함하여 이후 냉전 시대 전쟁들은 두 초강대국의 무능력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맺어진 미·소동맹이 깨지고 전후 질서에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는 내 편이 적의 손에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군비 경쟁의 저의가 깔려 있었다.

냉전 시대 전쟁이 1945년에서 1975년까지의 탈식민화 국면에서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유럽에서 보면 6·25전쟁은 유고슬라비아 위기를 비롯한 동서 냉전의 전선을 명확히 한 국제전이었다.

정승욱 선임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제나 '깜찍하게'
  • 정은지 '해맑은 미소'
  • 에스파 카리나 '여신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