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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의미술살롱] 오래된 미래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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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7-22 22:07:04 수정 : 2016-07-22 22: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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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근·입체감 섬세하게 구현한
원시 동굴벽화 놀라운 신비
수만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생생한 영혼의 통찰력 느껴져
생전에 피카소는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접하고 “알타미라 동굴벽화 이후의 모든 미술은 쇠퇴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그가 본 것은 생동감 있는 들소 그림이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의아할 정도였다. 인류 회화사의 압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충격을 받은 피카소도 돌아와 들소 그림을 남겼다. 일종의 오마주였다.

알타미라 동굴은 한 사냥꾼이 사라진 자신의 개를 찾다가 발견했다. 동굴 입구는 떨어진 바위로 막혀 있었고 자연적으로 생긴 석순마저 입구를 봉쇄하고 있어서 오랜 세월 은폐돼 있었던 것이다. 진공 통조림처럼 오래 보존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던 셈이다. 인근에 살던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동굴탐험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역사적인 동굴벽화를 찾아내게 된다. 그것도 동행한 다섯살 어린 딸이 바라보고 있었던 동굴 천장에서다. 아버지가 동굴 입구 바닥에서 선사시대 유물을 찾고 있었을 때 딸 아이는 심심함을 못 견디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 볼거리를 찾아다니다 동굴 천장의 들소 그림을 발견한 것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아마추어 고고학자는 탐사 결과를 책으로 펴냈지만 스페인 고고학회의 반응은 아주 싸늘했다. 학자들은 누구인가 머지않은 과거에 그려놓은 가짜라고 단언했다. 심지어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명예를 얻을 욕심으로 동시대의 화가들을 시켜 그림을 그리게 했다며 사기꾼으로 몰아갔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도저히 그릴 수 없는 그림으로 못을 박아버렸던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동굴벽화들이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아마추어 고고학자는 겨우 사기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여년 후의 일이다.

우리는 석기시대 인간들이 무조건 현대인보다 열등했을 것이란 편견과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사실 벌써부터 인류학자들은 인류 초창기의 무덤에서 발견된 두개골을 관찰해 그들이 후대 사람들보다 훨씬 지적인 인종이었음을 밝혀내기도 했다. 진화란 늘 우수한 종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석기시대 예술가들은 수천 년 뒤의 철기시대 예술가들보다 재료를 다루는 솜씨가 훨씬 더 능숙했고 상상력도 풍부했다는 것이 선사시대 미술연구자들의 이야기다.

프랑스 쇼베 동굴벽화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인류 최초의 그림으로 알려진 알타미라 동굴벽화나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벽화보다 훨씬 이전의 그림이다. 더 오래됐지만 더 세련된 모습이다. 명암으로 원근감까지 표현했다. 동굴 벽면의 울퉁불퉁한 면을 이용해 입체감을 구현하기도 했다. 목탄으로 그린 인류 최초의 순수미술이라 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에 하나도 뒤질 것이 없다.

더 놀라운 것은 활동사진처럼 여러 장면의 컷을 겹쳐 놓듯이 그림을 그려 놓았다는 점이다. 오늘날 영상물의 스틸 컷을 연상시킨다. 횃불을 들고 동굴 속을 다니면서 벽화를 보게 되면 움직임을 느끼게 된다. 300여점의 벽화 속에 12종류의 동물들의 대퍼레이드를 벌이는 모양새다. 석기시대 3D영상물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역동적이다.

동굴벽화에서는 서명 같은 손바닥 자국이나 발자국들,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기호들도 볼 수 있다. 현대미술이 석기시대 동굴벽화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갔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추상과 구상의 언저리에 머물고 있는 현대미술의 얼개는 동굴벽화에서 이미 구현된 것들이란 얘기다. 새의 얼굴을 한 인간, 간단한 선으로 심플하게 처리한 추상적 형상, 사자머리를 가진 인간의 모습도 있다. 이런 미적 감각은 장신구도 덩달아 발전케 했다.

어쩌면 동굴벽화의 공간은 그리스로마시대의 신전 같은 공간이자 오늘날의 성전 같은 기능도 했을 것이다. 단순히 저급한 원시적 주술공간으로 한정시키는 것은 또 하나의 편견일 수 있다. 현대인보다 귀도 눈도 밝고 통찰하는 능력도 뛰어났을 것이다. 쇼베동굴의 종유석 아래쪽에는 여성의 성기가 쌓인 것처럼 그려져 있고 그 위에 황소머리가 그려지기도 했다. 인간이 다른 세계에 들어가고, 사물에까지 깃들 수 있다는 생각이 담겼다. 일종의 애니미즘이다. 동굴벽화의 동물그림들은 영혼의 투과성을 단련시키는 성화 같은 묵상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우리들의 오래된 미래의 미학적 가치들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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