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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녹두장군의 추상같은 호령 들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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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9-01 14:00:00 수정 : 2016-08-31 21:2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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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담양 금성산성
전남 담양 금성산성은 험준한 지형에 조성돼 임진왜란, 병자호란, 동학혁명 등 난리 때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금성산성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50분 가량 오르면 산성에 이른다.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해 전세가 많이 기울었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순 없었다. 천혜의 요새인 이곳에서 재정비한 뒤 동지들을 더 규합하면 재기할 수 있을 것이란 일말의 가능성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재기는커녕 마지막 힘을 써 보지도 못한 채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전남 담양 금성산성에서 수백 명의 동지들과 재기를 계획했다. 식량과 무기 모든 것이 부족했다. 지원을 받기 위해 인근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 사는 동지 김경천의 집을 찾았다. 금성산성에 은신 중인 동학군의 식량지원을 상의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 길이 됐다. 김경천은 전봉준을 안심시킨 뒤 감영에 밀고했고, 동학혁명은 사실상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녹두장군은 잡혔지만, 금성산성에 남은 혁명군은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왜군과 관군을 맞아 혁명군은 혈전을 벌였지만, 무참히 패배했다. 이 전투로 성내외 각종 시설물이 완전히 파괴됐다.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금성산성의 불길이 석 달 열흘 동안 계속됐다고 전해진다.

전남 담양 금성산성은 우리 민족이 겪었던 전란과 관련 깊은 곳이다. 동학혁명뿐 아니라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난리 때마다 요새로 기능을 했다. 6·25 때는 빨치산들이 자리를 잡았던 곳이기도 하다. 금성산성이 험준한 지형에 위치한 군사요새로 성내에 계곡이 있어 식수 조달이 용이했기에 가능했다. 조선시대 이항복은 금성산성에 대해 “산성이 크고도 더욱 웅장해 평양성보다도 더 우수하고, 사람의 힘을 들이지 않고도 지킬 수 있는 곳이 절반에 이른다”고 평했다.

공략하기 힘든 험한 지형에 자리 잡은 금성산성이지만 이곳을 산행하기는 그리 힘들지 않다. 금성산성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시작되는 등산로는 대체로 평탄하다. 산행길을 따라 가면 옆으로 골짜기가 형성돼 있다. 이천골(二千骨)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왜병 간 벌어진 격전은 지옥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고 한다. 전투가 끝나고 왜군이 물러난 후 의병 시신을 계곡에 모았는데 2000여구에 달했다고 한다. 이에 골짜기 이름이 이천골이 됐다. 산행 중 연동사(煙洞寺)로 가는 길을 알리는 표지판을 만나는데, 이 절도 이천골과 관련이 있다. 전투에서 죽은 의병 가족들이 절을 찾아 향불을 피웠는데,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안개처럼 사라지지 않아 절 이름이 연동사가 됐다고 한다.
40∼50분 걸으면 남문인 보국문을 만난다. 외성인 보국문을 지나 5분가량 오르면 내성의 입구 충용문이 나타난다. 충용문에 오르면 보국문 성곽과 드넓은 평야가 이루는 풍경에 빠져들게 된다.

충용문에서 연결되는 산길을 따라가도 좋지만 성곽을 따라 노적봉과 철마봉을 먼저 오르자. 서쪽 방향이다. 가파른 성곽길을 따라 10분 정도 오르면 노적봉이다. 충용문에서 잘 보이지 않는 담양호와 추월산 등이 이루는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 특히 노적봉에서 보는 담양호는 우리나라 지도를 거꾸로 놓은 듯한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노적봉과 철마봉은 각각 군량미를 쌓아놓은 모양과 군마를 닮아 이름 붙여졌다.

노적봉까지는 가파르긴 해도 오를 만한데, 철마봉은 좀 더 힘들다. 노적봉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다시 노적봉보다 더 위에 있는 철마봉까지 올라야 한다. 경사도 심한 편이다. 철마봉에서는 노적봉보다 담양호 풍경을 더 자세히 담을 수 있다. 노적봉을 오르는 길엔 꼭 뒤를 한 번씩 돌아보자. 충용문과 보국문, 산성 성곽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철마봉을 지나 연대봉 쪽으로 계속 산행을 해도 되고, 다시 충용문으로 내려와 서문이나 동문 방향으로 산길을 따라 걸어도 좋다. 서문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30분 정도 걸으면 서문에 도착한다. 가던 길에 산성 안에 있던 보국사터를 지난다. 터 인근엔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가 한 채 있어 음습함이 느껴진다. 
서문에 이르면 가파른 산 중턱에 세워진 성곽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이곳에 성곽을 쌓을 수 있었을까 싶다. 이런 험한 지형에 성곽을 쌓다 보니 당시 죽어나가는 백성들이 수두룩했다. 성을 쌓으면서 동원된 백성들은 다섯 가지 유형으로 죽어갔다. 
배고파 죽고, 병들어 죽고, 돌에 치여 깔려 죽었으며, 여름엔 더위에 지쳐 죽고, 겨울엔 추위에 얼어 죽는 등 5사(五死)를 했다. 전라도 지역 욕 중 ‘오사랄 놈(오살할 놈)’이란 말이 여기서 생겼다고 한다. 감탄할 만한 풍광을 간직한 금성산성의 성곽 벽돌 하나하나엔 당시 민초들의 아픔과 고통도 각인돼 있다.

담양=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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