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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목숨 건 적 있냐?… 나는 그랬어”

입력 : 2016-10-20 21:01:44 수정 : 2016-10-20 21: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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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소설집 ‘믜리도 괴리도 업시’ “너는 문학에 목숨을 건 적이 있냐, 말로만이라도? 나는 그랬어. 내가 너를 잘못 봤다. 이제 그만하자, 우리.”

문학을, 취미나 여기가 아니라 ‘목숨’과 맞바꿀 정도의 치명적인 목적으로 생각해본 적 있느냐고 소설가 성석제(56)는 새 소설집 ‘믜리도 괴리도 업시’(문학동네)에서 묻는다. 이 소설집에 수록한 여덟 편 중 맨 처음 내세운 ‘블랙박스’라는 단편에서다. 나이든 소설가가 단편을 쓰다가 지쳐서 헤매는데 ‘나’와 이름이 같은 사내가 등장한다. 이런저런 밑바닥 거친 일을 거쳐 온 그 사내는 가방끈은 짧지만 일찍이 군대시절부터 연애편지를 일기처럼 쓰던 이력을 지녔다. 잡다한 경험과 독서량도 만만치 않은데, 이 자가 지친 나를 형님으로 모시며 지근거리에서 살뜰하게 돌보아 준다. ‘나’가 소설 쓰기에서 부닥친 난관은 문학에 생을 건 전업작가의 고통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마감 독촉 받는 걸 추심 전문 조폭의 목소리보다 듣기 싫어하는 나. 그 심정은 이렇다.

첫 소설집 ‘첫사랑’을 묶은 지 20년 만에 열 번째 소설집을 펴낸 성석제. 그는 “내게 서슴없이 다가와 나를 통과해가는 이야기들, 존재들, 삶이 고맙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문학동네 제공
“문제는 언제나 전과 다르고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독자를 움직일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나이가 들면 소설을 쓸 거리가 차 있는 탱크는 줄어들고 감정의 에너지는 약화되어서 독자를 움직이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나도 모르게 동어반복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소름이 끼친다. 내가 원래 생각했던 소설, 문학이 이런 것이었나 생각하면 자괴감에 몸서리가 쳐진다. 쉽게 말해 내가 쓴 소설이 전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썼다는 걸 부인하고 싶어진다. 필명을 쓸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하긴 그러면 어떤 잡지에서 청탁을 하고 실어주겠는가. 알량한 기득권도 포기하지 못하고 소설도 제대로 못 쓰니 미칠 것 같다. 어쩌다 들어오는 소설 청탁이 뜯어보기도 두려운 출두 통지서나 다름없다.”

매번 다르고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감, 자신도 모르게 동어반복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될 때의 끔찍한 자괴감, 그럼에도 알량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청탁이 들어오면 써나가야 하는 숙명, 그에게는 그 청탁서가 ‘출두 통지서’나 다름없다는 말 들은 많은 작가들이 통절하게 공감할 이야기일 성싶다. 성석제의 소설 속 ‘나’는 한두 번 ‘너’의 도움을 받다가 아예 너의 초고를 고쳐서 내 이름으로 보내는 타성에 젖어가는 와중에 너와 결국 결별한다. 그때 뼈아픈 ‘너’의 대사는 이러하다.

“형님, 문학이 별거예요? 그냥 노가리 까고 생각나는 걸 글로 쓰면 문학이지. 문학은 말로만 해도 되니까 과외나 비싼 레슨 받아야 하는 그림이나 음악보다 훨씬 쉽죠.” 이 말이 나의 자존을 건드려서 너는 문학에 목숨을 건 적이 있느냐고 말했던 것인데, 결별의 빌미가 됐다. 너는 정색을 하고 반말로 말한다. “이것들 뽕쟁이하고 뭐가 달라. 저 혼자 골방에서 약 빨다가 약발 다 떨어지면 밖으로 벌벌 기어나와가지고는 울고 짜고 훔치고 거짓말하고. 야, 씨발아,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필명으로라도 소설 써가지고 니들 동네 전부 말아먹을 수 있어. …야, 뽕쟁이! 너 다음에 다른 동네서 나 만나면 인사는 해라. 동명이인이라고 하면 싸인해서 공짜 책이라도 줄지 아냐.”

짐작하다시피 너는 내가 지어낸 또다른 소설 속 인물이었다. 나는, 성석제는, 소설 말미에 이렇게 통곡하듯 말한다. “결국 너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였다. 동명이인이라는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 자살, 피살, 자연사, 사고사, 병사, 중독사, 익사…. 내가 나의 분신인 너희들에게 부여한 죽음은 삶만큼이나 다양하다. 어떤 형태의 죽음이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 살아 있던 장소 또한 마찬가지다. 네가 죽고 난 뒤 나는 새롭게 불태울 숲을 찾는 화전민처럼 동네를 옮겼다.”

‘문자라는 고대의 집단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소설 속 인물들이여, 부디 작가를 원망하지 마시라는 전언이다. 이번 소설집 역시 성석제 특유의 입담이 읽는 이를 강한 흡인력으로 끌어들이거니와 여운은 더 묵직해졌다. 표제작으로 활용한 고려시대 청산별곡의 ‘믜리도 괴리도 업시’는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라는 의미인데, 동성애 사내에 대한 흥미로운 서사다. 시대의 아이러니와 욕망과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한 사내의 기구한 운명을 그린 ‘매달리다’만으로도 이번 소설집은 충분히 빛난다. 이밖에도 ‘먼지의 시간’ ‘골짜기의 백합’ ‘사냥꾼의 지도’ ‘몰두’ ‘나는 너다’가 수록됐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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