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집중취재] '그들만의 언어' 아리송한 행정 용어, 뭔 얘긴지…

입력 : 2016-12-05 21:17:18 수정 : 2016-12-06 14:47:29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부연 없이 사용… 수요자 혼란 키워 / 촉탁의·수가 등 어려운 한자도 비일비재 / ‘행복e음’ ‘e하늘’ 등 모호한 작명도 많아 / 복지사각 해소 걸림돌
'
“맞춤형 급여? 최저임금제를 말하는 건가요? 급여를 맞춰서 준다는 말이니까 ‘적어도 이만큼은 주겠다’ 이런 뜻 같은데요.”(39세 직장인 이모씨)

“국민연금 임의가입이라고 하면… 국민연금을 가입하든 말든 알아서 하란 뜻인가요? 아니면 가입조건을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건가. 출산크레딧은 진짜 모르겠어요. 크레딧이라는 단어가 뭘 뜻하는지 솔직히 모르겠네요. 크레딧이란 말은… 크레딧카드 외에는 거의 써보질 않아서요.”(37세 주부 김모씨)


보건복지 정책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전 생애주기에 걸쳐 국민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정책이 다양하고 제도가 복잡한 만큼 ‘아는 사람만 혜택을 누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쉽다. 최근 몇 년간 정부가 ‘맞춤형 복지’라는 이름 아래 복지 사각지대 해소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생소한 용어로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는 정책이 적잖다. 여전히 많은 정책이 언어 장벽에 막혀있는 것이다.

◆‘이 정도는 알겠지’… 넘치는 외국어·한자어

‘병원-기업-연구소가 결합된 한국형 메디클러스터 육성을 위해 홍릉 바이오·헬스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첨단의료복합단지에 임상시험센터 설치, 아이디어부터 마케팅까지 전 주기를 지원하는 바이오헬스 비즈니스 코어센터를 운영함’

지난 9월8일 복지부가 ‘보건산업 키워 수출 2배, 일자리 18만개 만든다’는 제목으로 발표한 보도자료의 일부다. 이 보도자료에는 빅데이터 연계 플랫폼, 오픈 이노베이션, 코호트, 바이오시밀러 같은 아리송한 단어들이 아무런 부연 설명도 없이 튀어나왔다.

헌법재판소는 지난달 24일 공문서의 한글전용 작성을 규정한 국어기본법 제14조에 대한 헌법소원에서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국민의 알권리를 존중한 취지였다.

그러나 저소득층이나 아동을 주요 대상으로 한 정책사업에는 ‘무늬만 한글’인 난해한 용어도 적잖다. 생활이 어려운 12세 이하 아동에게 맞춤형 통합서비스를 지원하는 ‘드림스타트’나 신용불량·질병·알코올 의존증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자활을 돕는 ‘자활 인큐베이팅’이 대표적인 예다. 이용권을 뜻하는 바우처도 ‘긴급보육 바우처’, ‘국민행복카드 바우처’ 등에서처럼 흔히 볼 수 있다.

10월 한글문화연대가 17개 정부부처의 석달치 보도자료 3505건을 분석한 결과 보도자료 하나당 국어기본법 위반은 2.2회, 외국어 남용은 6.2회로 조사됐다. 더불어민주당 조승래 의원이 국립국어원에서 받은 ‘행정기관 보도자료 개선 권고 현황’에서도 올해 17개 부처가 낸 보도자료 10건 중 7건이 문제 있는 보도자료였다. 이 가운데 복지부는 다섯 번째로 지적률이 높았다.

비교적 최근 등장한 정책에서 영어가 국민과의 소통을 방해하는 장벽이라면 ‘촉탁의’ ‘요보호’ ‘보수교육’ ‘기준소득월액’ ‘수가’ 등에서 보듯 일반적인 행정용어에서는 어려운 한자어가 걸림돌이다. 이 밖에 ‘행복e음’ ‘e하늘’처럼 영어와 한글을 섞어 쓰거나 맞춤형 급여처럼 구체성이 떨어지는 작명도 적지 않다.

한글문화연대 정인환 운영위원은 “사기업이야 물건을 팔기 위해 튀는 명칭이나 외국어를 쓴다 해도 정부가 일반 국민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정책을 알리면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용어를 내세우는 것은 큰 문제”라며 “특히 보건복지 중에는 건강과 생명에 직결되는 정책도 많기 때문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클릭하면 큰 그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 안 고쳐질까

정부의 정책·행정 용어가 좀 더 쉬운 말로 순화돼야 한다는 지적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는 국민연금에 출산크레딧 제도와 실업크레딧, 군복무크레딧을 차례로 도입했다. 각각 자녀를 둘 이상 낳거나 일자리를 잃었을 때, 군복무를 마친 경우 국민연금에 일정 액수를 얹어주거나 납입 부담을 덜어주는 제도이다.

국민 노후생활과 직결되는 이런 정책에 크레딧이라는 단어가 붙게 된 배경은 단순했다. ‘연금학자라면 다 아는 말’이라서 그랬단다.

국민연금공단 관계자는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대학) 학점을 크레딧이라고 하는데, 이처럼 크레딧은 무언가를 받는다는 뜻”이라며 “연금 학계에서도 가입자가 보험료를 내 얻은 점수를 크레딧이라 부르고, 학자들 사이에 아주 보편적인 용어여서 출산크레딧, 실업크레딧이라는 단어가 쓰이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30∼40대 직장인과 주부 중에는 국민연금 출산크레딧을 ‘출산 때까지 지원금을 주는 제도’나 ‘출산휴가 급여의 다른 이름’이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실업크레딧을 ‘실업수당의 다른 이름’ 혹은 ‘실업자 긴급생활자금 대출’로 생각하는 이들도 상당수다.

상명대 국어문화원 서은아 교수는 “정책 용어 중에는 공무원이나 전문가가 쓰는 ‘그들만의 언어’인데도 ‘이 정도는 알겠지’ 하고 쓰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이런 용어는 정책을 펴는 본인들만 편한 말”이라고 꼬집었다.

서 교수는 “언어란 기본적으로 소통”이라며 “적어도 언어가 장벽이 되지 않도록 최대한 쉽게 전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윤지로 기자 kornyap@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