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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 여성 거짓말에 '성범죄자' 낙인…남성에게만 유죄추정원칙? [심층기획]

입력 : 2018-11-11 18:39:50 수정 : 2018-11-12 15: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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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 여성 거짓말에 ‘성폭행’ 피소 / 무혐의에도 3개월 넘게 시달려 / ‘성범죄자’로 낙인찍혀 만신창이 / 누명 쓰고도 결백 입증할 길 막막 / 男에게만 유죄추정원칙? / 무고죄 고소 5년새 1400여건 ↑ / 불기소율도 56% → 79% ‘훌쩍’ / 피해자 진술 의존… 입증 어려워 / 솜방망이 처벌에 두번 울어 / “이별 통보에 구타·강간” 고소 / 男 강간피의자로 20일 옥살이 / 거짓말女는 징역 10개월 선고
최근 우리 사회에서 성에 대한 사고가 상당히 개방적으로 바뀌었다. 최근 통계청 조사에서는 ‘남녀가 결혼하지 않더라도 함께 살 수 있다’는 답변이 응답자의 절반을 넘는데 ‘결혼은 해야 한다’는 답변은 절반에 약간 못 미쳤다. 성범죄 여부를 놓고 다투는 일도 늘고 있다. 성범죄 고소사건은 성관계 등 신체적 접촉이 실제로 이뤄지고 사후에 그 강제성 유무를 따진다는 점에서 판단이 쉽지가 않다. 두 사람이 좋아서 만났고 헤어졌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억울하다고 항변한다.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가 않다. 성관계의 강제성을 명확하게 입증하기가 쉽지가 않다. 이 탓에 못된 성범죄자가 처벌을 피하는 사례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억울한 성범죄자를 만들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어”

A(36)씨는 2015년 겨울 경기도의 한 클럽에서 B(26·여)씨와 처음 만났다. 호감을 느낀 A씨는 술 한잔 하자고 권했고, 클럽에서 나온 두 사람은 근처에서 제법 오래 술을 마신 뒤 모텔로 향했다.

방에 들어간 B씨는 “진지한 만남을 가져볼 생각이 있느냐”고 제안했다. A씨는 그냥 “천천히 생각해 보자”고만 했다. 그러자 B씨는 “그럼 성관계를 원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A씨는 “알겠다”고 한 뒤 잠에 빠져들었다. 여기까지가 A씨가 기억하는 정황이다.

A씨가 일어나 보니 B씨는 이미 모텔을 떠나고 없었다. 얼마 뒤 B씨는 “A씨가 만취한 나를 강간했다”며 경찰에 고소장을 냈다. 조사 결과 B씨 몸에서 A씨 정액은 검출되지 않았다. B씨는 “성관계를 원치 않았는데 A씨가 억지로 모텔로 데리고 갔다”며 “그 이후는 술에 취해 기억이 안 난다”고 진술했다. A씨 변호인마저 “구속되느니 억울하더라도 일부 인정하고 합의를 통해 벌금형을 받는 게 낫다”고 조언했다.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된 이후 A씨는 B씨와 함께 모텔로 이동하기 위해 택시에 탄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카드 영수증 등을 토대로 수소문한 끝에 당일 승차한 택시 기사와 만날 수 있었고 블랙박스 영상을 확보했다. “취해 몸을 가눌 수 없었다”는 B씨 주장과 달리 블랙박스 영상 속 B씨는 멀쩡하게 차에서 내린 뒤 A씨와 다정한 포즈로 모텔로 걸어 들어갔다.

A씨는 결국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3개월 넘게 ‘성범죄자’로 낙인찍혀 악몽에 시달린 피해는 고스란히 남았다. 소문이 퍼진 데다 자주 수사기관에 불려 다니느라 업무를 할 수 없어 직장도 그만둬야 했다.

◆허점 이용한 진짜 가해자도 있지만

진짜 성범죄를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이는 없을 것이다. 피해자가 성폭행을 입증하기는 너무 어려운 일이다. 성범죄를 저지르고 나서도 버젓이 피해자를 항해 ‘뒤늦게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고 비난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A씨 같은 사안에서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성범죄자’로 단정해 형사처벌을 하려는 것은 문제란 시각이 적지 않다.

우리 형사소송법은 ‘열 명의 범죄자를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어선 안 된다’는 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다. 설령 범죄자일 개연성이 커 재판에 넘겨졌다 하더라도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는 헌법 27조 4항의 적용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유독 성범죄만은 뚜렷한 물증이 없더라도 진술만을 토대로 기소하거나 재판이 진행 중임에도 유죄로 단정하는 경향이 짙다. 남성과 여성의 진술이 상반될 때 ‘남성=가해자, 여성=피해자’의 구도로 진행되기 일쑤다. 물론 진짜 성범죄자는 엄중히 처벌해야 마땅하지만, 억울하게 성범죄 가해자로 몰린 이들의 누명을 풀어주는 것도 처벌 못지않게 중요하다.

11일 대검찰청에 따르면 2016년 강간 혐의로 입건된 5527명 중 절반에 가까운 2599명(47.02%)이 무혐의 등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강제추행의 경우 입건된 피의자 1만3472명 가운데 역시 절반에 육박하는 6715명(49.84%)이 증거 불충분 등을 이유로 기소되지 않았다. 함께 강력범죄 범주에 드는 살인의 경우 피의자 1002명 중 177명(17.66%)만 기소되지 않은 것과 커다란 차이가 난다.

일단 성폭행 혐의로 고소장이 제기되면 가해자로 지목된 이는 영락없이 수사기관에 불려가 조사받는다. 성폭행의 경우 사회적 비난이 워낙 거세다 보니 여론에 민감한 수사기관은 철저한 조사를 공언한다. 피고소인 입장에선 억울하고 불쾌하더라도 사적 공간에서 둘 사이에 벌어진 행위를 모두 설명해야 한다. 수사 기간이 길어지면 소문이 널리 퍼지고 피고소인은 재판이 시작하기도 전에 ‘성범죄자’로 낙인찍혀 만신창이가 된다.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이의 진술이 일관되고 구체적일수록 가해자로 지목된 이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성범죄 피해자를 무료로 돕는 시민단체와 자원봉사자는 차고 넘치지만 피고소인은 자기 돈을 주고 변호인을 선임하는 길밖에 없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검사는 “유무죄의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일관되고 구체적으로 진술하면 아무래도 유죄 쪽으로 무게가 쏠릴 수밖에 없다”며 “진술뿐 아니라 정황도 살펴보긴 하는데 서로 진술이 엇갈려 정황 자체가 애매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사건에 연루된 순간 큰 고통

무고죄 고소가 해마다 늘어나는 것도 이처럼 억울하게 가해자로 몰린 이들이 많다는 점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대검에 따르면 무고죄로 접수한 건수는 2011년 8541건에서 2016년 9957건으로 5년 새 1400건 이상 증가했다.

무고죄 입증은 대단히 어려운 게 현실이다. 무고죄 고소가 성범죄 피해자에게 두 번 상처를 안기는 것이라는 논리도 고소인이나 경찰에게는 부담이다. 성범죄 피의자가 수사 단계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거나 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고 해서 고소인에게 자동으로 무고죄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무혐의나 무죄 판결과 별개로 처음부터 거짓말로 상대방을 범죄자로 몰아 형사처벌을 받게 하려고 했다는 ‘악의’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무고죄 적용은 힘들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무고죄가 인정되더라도 처벌 수위는 낮은 편이다. 무고죄의 법정 형량은 최대 징역 10년, 벌금 1500만원으로 선진국과 비교해 오히려 무겁지만 실제로는 1년 이하 징역형이 대부분이다.

최근 무고 혐의로 기소된 C(26·여)씨에게 징역 10개월이 선고됐다. C씨는 “헤어지자고 했다가 구타와 강간을 당했다”며 옛 애인을 고소했으나 거짓말로 판명났다. 해당 남성은 강간 피의자로 구속돼 약 20일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온라인 공간에선 “남성의 고통에 비해 너무 가벼운 처벌 아니냐”는 여론이 들끓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무고는 처벌을 받게 하려는 악의적 고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며 “성범죄 사건에서 무죄 선고를 받더라도 (피해자의) 고소가 ‘합리적 의심’에서 비롯했다면 대부분 무고죄 적용이 어렵다”고 말했다.

김범수 기자 swa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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