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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기의시대정신] 삼체, 거짓말, 시대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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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4-29 23:55:02 수정 : 2024-04-29 23:5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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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후 선거사범 1400명 달해
삼체인 거짓말쟁이 손절했지만
현실선 정치인發 ‘가짜뉴스’ 등
눈 부릅뜨고 지켜볼 수 밖에…

30년 전쯤 들었던 노래가 거리에서 다시 들린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유감’이다. 걸그룹 에스파가 연초에 리메이크했다. 서태지도 리마스터링 음원을 새로 공개했다.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라는 가사가 여전히 심장을 할퀴고 지나간다. 노래를 쓴 20대 청년이 중년이 되고 다시 20대 후배가 노래하지만, 거짓과 가식에 물든 시대에 대한 유감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화제가 되고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3 Body Problem)’에는 독특한 설정이 나온다. 외계 종족 삼체인이 지구인 추종자와 소통하던 중 벌어진 에피소드다. 삼체인은 늑대가 할머니를 잡아먹고, 할머니 분장으로 소녀를 속이는 동화 ‘빨간 망토’를 이해하지 못한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지능이 낮거나 특별히 도덕관념이 투철해서가 아니다. 텔레파시와 흡사한 빛에너지로 소통하는 그들에게는 생리적으로 ‘생각하다’와 ‘말하다’가 같은 의미이다. 당연히 생각을 감춘다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전 KBS PD

몇 번의 반문 끝에 거짓말에 대해 이해하게 된 순간, 삼체인은 지구인과의 소통을 단절하고 더욱 적대적으로 변모한다. 자유자재로 거짓을 말할 수 있는 지구인은 공존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상상해보자. 생각과 언어가 다를 수 있다는 걸 처음 경험한 이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충격이고 두려움이었을지.

당연하게 생각해온 인류라는 종의 특징, ‘거짓말’에 대해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해보게 된다. 원작인 중국 작가 류츠신의 동명 소설이 아시아 최초로 휴고상을 수상하고 전 세계 3000만권 판매를 기록할 만큼 탁월한 성취를 인정받은 이유는 이러한 독창성과 철학적 함의에 기인한다. 인류는 얼마나 많은 거짓을 뿌리고 키우고 거두며 살고 있는가.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동물’에 불과했던 현생 인류 사피엔스가 지구를 지배하게 된 데에는 거짓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주효했다고 설명한다. 신화나 설화와 같은 상상의 산물을 만들어내고 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이 집단을 하나로 묶고 문명을 이루게 했다는 것이다. 화폐 제도나 국가와 같은 공동체 개념 역시도 하나의 거대한 거짓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스토리텔링이란 점에서 허구란 뜻이다.

허구를 공유하며 복잡한 협력관계를 형성하게 하고 결국 종의 전쟁에서 인류를 승리로 이끈 거짓말. 그러나 이 무기는 이제 내부에서 서로를 향해 난사되며 온갖 불신과 고통을 낳고 있다. 멀게는 인류 역사의 수많은 참상과 오욕과 불평등을 낳은 거짓부터, 가깝게는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사기꾼들까지. 친절한 임대인이 전세 사기범이 아닐지, 정중하게 걸려 온 전화가 보이스피싱이 아닐지, 허리를 굽히며 달콤한 약속을 건네던 정치인이 입을 싹 닦지는 않을지, 우리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살고 있다.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라는 탄식이 어제고 오늘이고 공감을 자아내는 이유다.

실수를 덮으려 거짓을 모의한 프로야구 심판들로 야구계가 떠들썩했다. 한 사람이 퇴출되고 두 사람이 징계받으며 마무리됐지만, 심판의 생명과도 같은 권위와 신뢰에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래도 반성하고 자정하는 스포츠인들은 양반이란 생각이 든다. 개인 혹은 소속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거짓을 서슴지 않고 심지어 부끄러움도 모르는 이들이 차고 넘치니 말이다.

해마다 영국에서 열리는 ‘세계 거짓말 대회’는 국적에 상관없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지만 정치인과 변호사만큼은 출전할 수 없다. 두 직업군은 거짓말에 관한 한 ‘프로’들이니 아마추어 게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풍자다. 총선을 치러낸 한국의 유권자들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날뛰는 거짓 선동과 유언비어 속에서 매일같이 세계 최고의 거짓말 대회가 열리는 듯했다.

가장 큰 권한과 의무를 부여받은 정치인들이 가장 낮은 도덕적 기준 아래 평가받고 있는 현 상황이 안타깝다. 많은 유권자들이 제 편이라 여기는 정치인의 거짓에 둔감하고 관대하기까지 한 모습은 큰 불행이다. 거짓말을 거듭해도, 심지어 들통이 나도 손해가 없고 오히려 더 나은 보상을 얻는다면 그 거짓말은 계속 강화될 수밖에 없다. “전체주의 지배가 노리는 가장 이상적인 대상은 확신에 찬 나치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사실과 허구, 참과 거짓을 더 이상 분간하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이다.”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의 경고다.

총선이 끝나고 1400여 명이 선거사범으로 수사받고 있다. 지난 총선에 비해 허위사실유포 사건이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아니면 말고’ 식의 가짜뉴스는 이제 선거판의 필수전략이 된 지 오래다. 삼체인은 거짓말 능력자 지구인을 일찌감치 손절했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수많은 거짓말쟁이들과 공존할 수밖에 없다. 진실과 거짓을 향한 더 예리한 시선으로 5월 개원하는 22대 국회를 지켜봐야 할 때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전 K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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