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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사랑도 아닌 것의 끝, 이별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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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5-09 23:33:46 수정 : 2024-05-09 23:3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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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불협화음을 내지요, 8월의 짝사랑/마르면서 타들어가 뿌리까지 뽑힙니다/끝을 보아버린 검자줏빛 미소가/가지 사이에 박힙니다/활활 타는 심장만이 있고,/만질 수도,/키스도 할 수 없는 불꽃.’ 박미산 시인의 시 ‘불타는 오디나무의 노래’ 끝부분이다.

박 시인은 1993년 8월 끔찍히 아끼던 대학생 여조카 ‘미래’를 잃었다. 집안의 첫 조카였으니 가족들 사랑이 대단했다. 조카를 짝사랑하던 대학 선배가 있었다. 그는 조카가 미국 유학을 떠나려는 걸 알고선 사랑을 받아 달라고 수차례 애원했다. 8월 어느 날에는 도서관에 있던 조카를 불러내 껴안고 준비한 시너에 불을 붙이고 말았다.

박 시인은 이 끔찍한 사랑을 시로 써보려 했으나 15년간 쓸 수 없었다. 충격과 슬픔, 특히 원망이 컸을 것이다. 세월에 아픔이 조금씩 묻히면서 그 남자의 입장에서 시를 썼다. 부제 ‘미래에게’에는 조카 이름이 담겼다. 시의 화자는 끝을 알고 있다. 그 남자는 연심의 고백을 상대방이 귀머거리처럼 무시하자 좌절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교감이 없는데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마르면서 타들어가 뿌리까지 뽑히고 마는 부질없는 욕망일 뿐이지 않은가.

길거리를 걷다가 “도에 관심 있느냐”는 말을 듣고는 한다. 무시·무대응이 현명하다. “관심 없다”고 하는 순간 이미 말걸기에 넘어간 것이다. 발디딜 공간을 내준 셈이다. 다시 무대응으로 바꾸기에는 늦었다. 암벽타기 선수는 손이나 발로 의지할 아주 작은 틈이나 공간만 있으면 기어오른다. 밋밋한 벽면은 최고수일지라도 절대 못 오른다. 세상살이도 그렇게 틈과 공간을 내주지 않으면 안심해도 될까. 서로 알지 못하면 요구하지도, 상처 주지도 않고 밀어낼 짝사랑도 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

현실은 무섭다. 강남역 남녀공용 화장실에 들어간 여성이 생면부지 남성에게 희생됐다. 신림역과 서현역에선 묻지마 살인극에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고 부상했다.

수능 만점을 받은 명문대 의대생이 만나주지 않는 여자친구를 살해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사랑이 아니다. 비뚤어진 사랑도 아니고 그저 비뚤어진 소유욕일 뿐이다. 뿌리가 뽑히는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억울하게 희생당한 이의 명복을 빈다.


박희준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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