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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윤의어느날] 김밥 오십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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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6-04 02:03:57 수정 : 2025-06-04 02: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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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대 시절의 나는 항상 바빴다. 세상의 규격에 맞춰 나를 깎아내면서도 꿈을 지키려면 마음의 둑을 단단히 세워야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거창한 이유가 아니었다. 나는 항상 돈을 버느라 바빴다. 꿈을 지키려면 어떤 식으로든 돈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대학원 등록금을 벌려고 지하상가 옷가게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였다. 출구만 스무 개가 훌쩍 넘는 대규모 상가에는 옷가게와 소품가게 등이 빼곡했다. 어느 가게든 직원을 구하고 있었고 어느 가게든 여러 소문이 돌았다. 내가 일하던 곳 사장은 늘 어딘가의 소문을 물어와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어느 날은 옷가게를 일곱 개나 운영 중인 조 사장 이야기가 화두였다. “조 사장이 점심때만 되면 김밥을 오십 줄씩 사다 나르거든.” 그는 가게 안쪽 창고 테이블마다 김밥을 일곱 줄씩 쌓아둔다고 했다. 직원들의 점심 겸 저녁용으로, 번갈아 창고로 들어가 십오 분 동안 김밥 한 줄을 먹는 게 휴식 시간의 전부라는 것이었다. “지금 날이 이렇게 덥잖아? 그 좁고 더운 데서 김밥이 다 쉬어터진 거지. 어제 직원 하나가 그걸 들고 나와서는 조 사장 얼굴에 냅다 던졌대. 이딴 거 너나 먹으라고 난리를 쳐대고, 아휴.” 조 사장이 김밥을 준 지 오년이 넘었다고, 그간 알바든 직원이든 항의가 들어온 건 어제가 처음이라고 했다. “바보들이지 뭐야. 거기 직원이 얼마나 많은데 절반만 모여서 제대로 따졌어도 진작 달라졌을걸.” 그래서 어떻게 됐대요? 같이 일하는 혜지가 묻자 사장이 씩 웃었다. “오늘도 사가더라, 김밥 오십 줄.”

혜지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손님이 뜸한 오후 두 시쯤이 우리 점심시간이었다. 김밥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점심 메뉴도 제육볶음과 순두부찌개로 늘 똑같았다. 사장은 꼭 이인분만 주문한 뒤 공깃밥 하나를 추가해 셋이 먹도록 했다. “내가 가게 볼 테니 둘이 먼저 먹고 나와.” 반찬이 모자랐으므로 혜지와 나는 사장 몫을 남기기 위해 삼 분의 일쯤은 맨밥을 먹어야 했다. 그날따라 혜지는 제육볶음을 빠르게 먹어치웠다. “언니, 오늘부터 이거 우리가 다 먹어버려요.” “사장님 건?” 내가 묻자 혜지가 순두부찌개를 밥그릇에 덜어 썩썩 비비며 답했다. “아까 말하는 거 못 들었어요? 바보들이라잖아요.” 우리는 땀을 흘리며 맵고 짠 것들을 바닥까지 비웠다.

이걸 다 먹으면 어떡해? 사장의 말에 혜지는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그 가게 양이 줄었나 봐요. 이제 삼인분 시켜야 할 것 같아요.” 사장은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이인분을 주문했다. 사장이 먼저 밥을 먹는 날엔 한 명이 따라 들어가 어떻게든 반찬을 전부 먹어치웠다. “여자애들이 웬 식탐이 이렇게 많아.” 결국 사장은 언짢은 기색으로 오징어볶음이나 된장찌개를 추가하게 되었다. 비로소 삼인분을 주문하게 되자 혜지는 말했다. “사장님, 저 오늘은 계란말이 시켜도 돼요?”

계란말이를 케첩 종지에 찍어 넣던 혜지의 의기양양한 얼굴이 떠올랐다. 혜지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어디서 무얼 하든 쉬어빠진 김밥이나 맨밥을 참고 먹는 사람만은 되지 않았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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