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도 해양과학기지. 제주 남단 마라도에서 서남쪽으로 149㎞ 떨어진 이어도에 설치된 대한민국 3대 해양과학기지 중 하나다.
하지만 이곳을 포함한 서해 일대가 군사적 이해관계가 뒤얽힌 ‘뜨거운’ 곳이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어도 해양과학기지 상공은 일본이 1969년 선포한 방공식별구역(JADIZ), 2013년 중국이 설정한 방공식별구역(CADIZ), 한국이 같은 시기 확장한 방공식별구역(KADIZ)이 겹치는 곳이다. 3국이 서로 관할권을 주장하는 모양새다.
이어도 해양과학기지 인근 해역과 서해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끊임없이 관공선과 군함 등을 투입, 해양 권리 행사 범위를 넓히고 있다. 한·중 해양경계가 획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서해 주도권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라는 지적이다.
해군력 증강을 추진하는 북한과 북방한계선(NLL)을 두고 대치중인 한국 해군과 해양경찰은 중국의 움직임까지 견제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대만에서의 미·중 무력충돌 위험까지 감안하면, 서해를 둘러싼 긴장의 파고는 한층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해양 주권 수호를 위한 전략이 필요한 대목이다.

◆중국의 한국 관할해역 활동 빈번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임종득 의원이 9일 합참·해군본부와 해양경찰청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중국은 서해에서 활동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 군함의 한국 관할해역 진입은 2020년엔 약 220회, 2021년엔 약 260회, 2023년엔 약 360회, 2024년엔 약 330회에 이어 올해는 9월 기준으로 약 260회에 달했다.
중국은 지난 5월 최신예 항공모함 푸젠함을 서해 잠정조치수역에 투입, 시험항해를 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해역을 선박 출입을 금지하는 항행금지구역으로 설정했다.
한·중은 2000년 어업협정에 따라 양국 배타적경제수역이 겹치는 해역에 해양경계선 확정 전까지 어업 자원 공동관리를 위해 잠정조치수역을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어업과 항행만 허용된다. 각국이 자국 선박에만 관할권을 행사한다.
그런 점에서 중국의 항행금지구역 설정은 타국 선박에 대한 사실상의 단속을 예고했다는 점에서 한·중 어업협정과 유엔해양법협약 정신을 위배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이어도 해양과학기지 인근 해상에선 중국 관공선 출현이 지속되고 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이어도 근해에 나타나던 중국 관공선은 2010년대에 들어 횟수가 부쩍 잦아지고, 접근도 빈번해졌다.

2016년 12월 중국 관공선이 이어도 남쪽 55㎞ 해상에 접근했으며, 같은해 5월엔 이어도 남쪽 37㎞ 해상에 중국 해양과학조사선이 나타나기도 했다.
2021년에도 7회, 2022년과 지난해에도 각각 2회씩 출현했다.
2018년부터 서해에서 발견된 중국 해양관측부표는 13개에 달하며, ‘양식시설’이라며 잠정조치수역에 대형 구조물도 설치했다.
중국의 이같은 움직임은 팽창적·배타적 해양전략으로서 미국·일본 등 전통적 해양국가 전략과 뚜렷한 차이를 드러낸다.
중국은 분쟁수역에서 인공지형물 설치, 항행금지구역 설정, 관공선·군함·어선을 동원한 물리력 과시를 병행하고 있다.
이같은 일들이 반복되면, 타국 어민들은 조업에 부담을 느끼게 된다. 상선 선원들도 마찬가지다.
타국 선박이 분쟁수역 항해를 회피하면, 해당 수역은 중국의 내해(內海)처럼 된다.
서해는 중국이 이같은 해양전략을 구사할 필요성이 높은 곳이다.
중국 동부 연안은 강에서 유입되는 토사가 쌓여 수심이 비교적 얕다.

그런데 중국 해군 함정들은 갈수록 대형화하고 있다. 최신 055급 구축함은 만재배수량이 1만2000t이고, 항모 푸젠함은 8만5000t에 달한다.
대형함정이 안전하게 항해하려면 충분한 수준의 수심을 지닌 해역이 필요하다.
서해 잠정조치수역과 이어도 근해는 중국 동부 연안보다 수심이 깊고, 중국 북해·동해함대가 유사시 대만 해협과 태평양으로 나아갈 길목에 있다.
이곳에서 중국 해군이 자유롭게 움직인다면, 대만 장악 시도가 쉬워질 수 있다.
중국이 서해에서 입지를 강화한다면, 유사시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옵션은 축소된다.
이는 서해에서의 한국 해양 활동이 위축될 위험으로도 이어진다. 힘의 논리가 적용되는 바다에서 중국의 해양력이 강해지면, 한국은 영향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평택 주한미군기지, 제주 해군기지, 이어도 해양과학기지 등이 모여있는 서해에서의 영향력 약화는 국가안보 문제와 직결된 사안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미국은 한국에 경고를 보내는 모양새다.
존 노 미 국방부 인도태평양 차관보 지명자는 7일(현지시간) 상원 군사위원회 인준 청문회에 제출한 답변에서 “서해에서 중국의 활동은 한국을 위협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범정부적 대응 등으로 극복해야
군 당국은 단호한 대응을 강조하고 있다.
진영승 합참의장은 취임 전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제출한 서면답변에서 서해에서의 중국 움직임에 대해 “군은 중국의 서해 활동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중국군 활동을 면밀히 감시·추적하고, 중국의 군사활동에 대해서는 비례성에 입각한 조치를 단호하게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군과 해경이 중국의 해양활동을 비례성에 입각해서 저지하기에는 제약이 적지 않다.
한국군의 주적은 북한군이다. 따라서 한국 해군은 북한 해군을 막는 것이 첫번째 임무다.
NLL을 사이에 두고 대치중인 북한 해군은 최근 수년간 전력증강을 지속해왔다.
순항미사일을 탑재한 1500t짜리 압록급 호위함을 건조했고, 최근엔 구축함 최현함을 만들었다.

노동당 창건 80주년을 맞아 이달 초에 열린 무장장비전시회의 일부로서 공개된 최현함은 위상배열레이더와 무장체계를 통합했다.
전투통제실과 함교는 한국 해군 신형 호위함이나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현대화됐다.
북한 관영언론은 최현함 함교와 전투통제실 화면에 서북도서 일대의 해도가 노출된 장면을 내보냈다.
현대화된 북한 해군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국방부가 발간한 ‘2022 국방백서’에 따르면, 한국 해군 전투함정은 90여척. 중국 해군은 초계함·연안전투함정만 약 200척, 구축함·호위함은 80여척에 달한다.
한국 해군은 전투함정 상당수를 북한이라는 주적을 상대하는데 투입해야 한다.

수적인 열세로 인해 중국이 서해의 우리측 관할해역에 매년 수백 차례씩 진입하는 등의 군사적 행동을 취해도 비례성에 따른 대응을 지속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범정부 차원의 명확한 국가 해양·안보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이를 통해 외교·정보·법률·군사적 수단을 유기적으로 통합해서 중국의 팽창적 해양전략에 대응해야 한다.
우방국들과의 협력 강화도 대안이 될 수 있다.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분쟁에 직면한 필리핀은 2023년 미국이 필리핀 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지를 기존 5곳에서 9곳으로 늘렸다.
지난해부터 미군의 타이폰 중거리 미사일과 네메시스 지대함 미사일 배치를 허용했다. 일본·영국·호주 등 서방 국가와의 군사협력도 강화하고 있다.
경제·군사적으로 중국보다 크게 열세인 필리핀은 독자적으로는 중국의 해양 패권 행보를 저지하기 어렵다.

따라서 중국을 경계하는 서방 국가들과 연대해서 중국을 견제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한국은 한·미 동맹을 활용할 수 있다.
미국은 가장 심각한 안보 위협으로 중국의 팽창을 지목하고 있다. 서해에서 중국 해군이 활발하게 활동하면, 대만 유사시 중국을 저지할 미국의 군사적 옵션은 줄어든다.
서해에서의 영향력 유지라는 측면에서 양국의 이해관계가 겹친다는 점을 미국 측에 강조하면,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 한층 수월해질 수 있다.
서해는 이제 단순한 어장이 아니다. 해양 주권과 안보, 국제질서가 서로 뒤얽힌 전략적 무대다.
이 공간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한다면, 위협은 우리 눈앞에 바짝 다가오게 된다. 중국의 팽창적 해양전략을 경계하면서 종합적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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