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45년 9월2일 일본 도쿄 앞바다. 그곳에 정박한 미 해군 함정 ‘미주리’ 갑판 위에서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식이 열렸다. 일본인으로선 대단히 치욕스러운 임무를 띠고 미주리함에 오른 이는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당시 외무상이었다. 그는 1932년 4월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일본 군부 및 정부 인사들을 겨냥해 던진 폭탄의 파편에 맞아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의족과 지팡이에 의존하는 시게미쓰가 절뚝거리며 항복 문서가 놓인 책상까지 이동한 다음 선 채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자필 서명을 하는 동안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미군 원수는 차가운 눈으로 그 일거수일투족을 응시했다. 시게미쓰는 일왕이 항복을 선언한 직후인 1945년 8월17일 이른바 ‘패전 처리’를 위해 급하게 외상에 임명됐다. 그 전임자인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 외상이 “종전으로 내 역할은 모두 끝났다”며 사임 의사를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고는 1882년 가고시마(鹿兒島)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임진왜란 당시 전북 남원 부근에서 살던 조선인 도공(陶工)이었다. 도고의 아버지 때까지도 박(朴)씨라는 한국식 성 사용을 고집했는데, 아들의 미래를 걱정한 부친이 어느 사무라이 집안의 족보를 사들인 뒤 일본식의 ‘도고’(東郷)로 성을 바꿨다. 그렇다고 일본인들 사이에서 바로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학생 시절부터 도고는 ‘조선인의 후예’란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다.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공부해 수재들만 간다는 도쿄제국대학 독문학과에 입학했다. 건강이 나빠 동기생들보다 1년 늦은 1908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외교관이 되기로 결심한다. 여러 차례 낙방의 쓰라림을 맛본 끝에 1912년에야 외무성에 들어갔다. 도고는 1922년 40세의 늦은 나이로 외국인 여성과 결혼했다. 그의 집안 내력을 잘 아는 일본인들이 사위로 삼길 꺼린 탓이었다. 부인은 유대계 독일인으로 사별한 옛 남편과의 사이에 자녀를 다섯이나 낳은 과부였다. 나라 없는 설움을 아는 민족끼리의 서글픈 결합이라고 해야 할까.
1930년대 독일은 일본의 동맹이었다. 덕분에 독일어가 유창한 도고는 외무성에서 승승장구했다. 주(駐)독일 대사를 거쳐 소련(현 러시아) 주재 대사까지 지내고 1941년에는 외무상으로 입각했다. 오늘날 극우 세력은 바로 이 점을 들어 “일본에 조선인 차별은 없었다”며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도고가 일본 외교를 책임지고 있던 1941년 12월7일 일본 군부가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단행하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다. 공교롭게도 일왕이 항복 의사를 밝힌 1945년 8월15일 당시의 외상도 도고였으니 일본 제국주의의 발흥과 몰락 둘 다 바로 곁에서 지켜본 셈이다. 미군이 일본을 점령한 뒤 전범 혐의로 기소돼 징역 20년형이 확정된 도고는 도쿄의 한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1950년 7월23일 68세를 일기로 옥사(獄死)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하겠다.
이명박정부 시절 국무총리를 지낸 김황식(77) 호암재단 이사장이 최근 ‘일본인 88인의 이야기’(나남)라는 저서를 펴냈다. ‘인물을 통해 알아보는 일본’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제목처럼 저자 입장에서 ‘한국인이 꼭 알았으면 좋겠다’ 하는 일본인 88인의 사연을 소개한다. 그리고 여기에 도고 시게노리 전 외무상, 한국 이름 ‘박무덕’(朴茂徳)이 포함돼 있다. 김 이사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한·일 양국 국민은 역사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며 “2차대전 전범으로 몰려 교도소에서 숨진 도고 시게노리 외상은 한국계였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그러면서 “이 책이 한·일 양국이 서로를 객관적으로 보고, 균형 잡힌 이해를 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길 바란다”는 희망을 전했다.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신임 일본 총리의 외교 정책을 보좌하는 이들부터 먼저 읽어야 할 저서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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