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dak 필름 한 롤 서른여섯 번의 셔터를 누르며 사진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카메라에 표시된 필름 카운터가 25 정도가 되면 고민이 시작됐다. 필름을 새걸로 갈아야 하나 남은 거로 찍어도 될까? 제한된 서른여섯 번의 셔터를 누르는 순간의 신중함과 긴장감, 설렘은 지금의 디지털카메라 시대에는 느낄 수가 없는 감정이다.
사진기자는 본인이 취재했던 사진을 나름의 방식으로 보관한다. 개인의 차이는 있지만 나는 사진의 중요도를 떠나 보관을 많이 하는 사진기자이다. 역사의 중요했던 순간도 있었고, 상황이 기억도 없는 시답지 않은 사진도 있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담은 기념사진도 있고 취재와 출장 중에 보이는 나의 모습도 있다.
아주 먼 옛날의 모습은 아니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열어본 나의 외장하드를 독자들과 같이 꺼내보고 추억하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2001년 5월 16일 서울 종로구 종묘공원에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유족회 주최로 열린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규탄 및 시정촉구 범국민대회'에서 참가자들이 일본을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6년 현재도 일본 정부의 역사 교과서 왜곡과 독도 망언, 강제징용자와 위안부 폄훼는 계속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출신 노동자들의 한이 서린 곳인 사도 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아픔이다.
25년 전인 2001년 5월 16일, 서울 종묘공원에서 열린 ‘역사 교과서 왜곡 규탄 및 시정 촉구 범국민대회’ 현장으로, 사진 설명에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유족회가 기록돼 있다. 일본 역사 교과서 문제가 한국 사회의 거센 반발을 불렀던 그해 봄, 항의의 목소리는 태극 문양이 그려진 부채들이 머리 위로 솟았다. 손바닥을 펼쳐 든 사람들 사이로 역사왜곡을 규탄하는 피켓이 빼곡하다. 흰 모자와 붉은 차양 아래 드러난 얼굴들은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입을 크게 벌린 참가자들의 표정과 치켜든 팔이 집회의 열기를 전한다. 종묘공원에 모인 사람들은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을 규탄하며 시정을 촉구하고 있었다.
논란의 중심에는 일본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주도하고 후소샤가 펴낸 중학교 역사 교과서가 있었다. 2001년 4월 3일 일본 정부의 검정을 통과한 이 교과서는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국 정부의 항의와 수정 요구가 이어졌고, 시민사회에서도 역사왜곡을 규탄하는 움직임이 확산했다. 학생들이 배울 책의 서술이 양국 관계를 흔드는 외교 현안으로 번졌다.
사진 속 요구는 직설적이다. 참가자들의 어깨를 가로지른 띠에는 ‘역사왜곡을 규탄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손에 든 피켓에도 일본을 향한 항의와 시정 요구가 담겼다. 태극 문양 부채와 펼친 손, 머리 위로 들어 올린 피켓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앞줄 참가자들의 굳은 표정과 크게 벌린 입에서는 당시의 격한 반응을 읽을 수 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지만, 사진에 드러난 요구는 분명했다.
독립유공자 유족회가 이름을 올린 집회라는 기록은 이 장면의 무게를 더한다. 식민지 지배와 독립운동은 유족들에게 가족의 삶과 연결된 역사였다. 교과서의 서술을 둘러싼 논쟁에는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지우는가라는 문제가 놓여 있었다. 침략과 저항의 역사가 다음 세대에게 어떤 모습으로 전해질지, 그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종묘공원에 모였다.
25년이 지난 지금, 사진은 집회의 소리를 대신해 손과 표정을 보여준다. 모든 참가자의 이름과 사연을 알 수는 없지만, 이들이 무엇에 항의했는지는 피켓과 어깨띠에 남아 있다. 교과서는 학생들이 역사와 처음 만나는 중요한 통로다. 그 안에서 침략의 책임이 흐려지고 피해의 기억이 축소된다면 잘못된 인식도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다. 이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요구한 것은 과거의 사실을 제대로 기록하고 가르치라는 것이었다. 오래된 사진 속 태극 문양 부채들이 그 요구를 여전히 선명하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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