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KN 몰래 듣고 PC통신에서 배우고
가사 A4 20박스 “우리말로 랩해야겠다”
1990년대 후반 서울 홍익대 T동 꼭대기 층. 밤 10시 반이면 건물이 폐쇄돼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산업공학과 대학원생 이재현은 교수가 내준 빈방에서 5년 가까이 먹고 자며 논문을 썼다. 새벽이면 연구실 전신 거울 앞에 서서 낮에 쓴 가사를 손짓과 함께 읊었다. “좀 태가 나는데, 래퍼 같아.” 가리온의 MC메타(본명 이재현·55)가 2024년 3집 수록곡 ‘01410’의 마지막 벌스(랩의 절)에 쓴 “내 첫 팬이야, 거울 속의 래퍼가”는 그 거울 앞의 이야기다. 곡 제목 01410은 그를 힙합으로 이끈 PC통신 하이텔의 접속번호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1998년 결성된 가리온은 영어 한 줄 섞지 않은 한국어 랩으로 1세대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상징이 됐고, 2집으로 2011년 한국대중음악상 3개 부문을 수상했다. 그 사이 MC메타는 세브란스병원 주차장 주임으로 1년6개월을 일했고, 대구 사투리로 랩을 했다. 쇼미더머니 무대든 지방의 작은 공연장이든 가리지 않고 누볐다. 힙합의 생일로 불리는 지난 8월11일 나온 4집 ‘GARION 4’는 11곡 전부를 그가 직접 프로듀싱했다. 그는 이 앨범을 “숙성이 된 어른 힙합”이라고 소개했다.
7월14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작업실에서 MC메타를 만났다. 4집 발매를 한 달 앞둔 때였다. 1971년 대구에서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장 구하고 빨리 결혼하는 게 이상적인 삶이던 시절, 대구는 그런 성향이 더 강했다”며 “어릴 땐 꿈도 없었고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두 시간 가까운 인터뷰에서 그는 주한미군 방송 AFKN과 PC통신 하이텔로 힙합을 접하던 시절부터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주차장 주임으로 일하던 때, 그리고 ‘모두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는’ 2026년의 한국힙합까지 짚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AFKN의 아폴로 쇼, 몰래 들은 랩
―처음 힙합에 매료된 순간이 기억나나.
“아버지가 집에 재봉틀 두어 대를 놓고 작은 공장을 하셨다. 하루 종일 재봉틀을 돌리던 10대 후반 누나들이 심심하니까 계속 LP를 틀었다. 집에는 늘 가요나 팝이 흘렀다. 그래서 음악에 거부감은 없었는데 매니아처럼 듣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후반, 대학 입시를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할 때 갑자기 좋아하는 게 생겼다. 통기타였다. 1980년대 중후반이니 포크와 발라드에 빠졌다가 악기를 하다 보니 록을 듣게 됐고, 록에서 하드록, 헤비메탈로 점점 매니악하게 갔다. 그러다 AFKN을 봤다. 주말 새벽에 ‘아폴로 쇼’, ‘인 리빙 컬러’, ‘소울 트레인’ 같은 프로그램에서 래퍼들이 나오고 펑크와 소울을 라이브로 들려줬다. 거기서 충격을 받았다.”
―록을 듣던 사람에게 랩은 어땠나.
“예전에 록 듣던 사람들은 록이 최고라며 다른 장르를 엄청 배척했다. 친구들끼리 기타 치고 놀다가 누가 변진섭을 들었다고 하면 배신자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특히 흑인 음악은 춤을 추니까 ‘춤추는 음악은 쓰레기, 저게 무슨 음악이냐’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몰래 들었다. 자막에 팀 이름이나 곡 제목이 나오면 적어뒀다가 찾아봤는데 라디오 말고는 찾을 데가 없었다. 어떤 곡이 가장 와닿았는지 꼭 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너티 바이 네이처’를 처음 들었을 때 리더 트리치의 랩에 강한 임팩트를 받은 기억은 난다.”
◆하이텔 ‘블렉스’, 200명의 음감회
―하이텔 흑인음악 동호회에는 어떻게 들어갔나.
“처음엔 동호회가 아니었다. PC통신에서 동호회가 되려면 회원 수 조건이 있었는데 그전에는 게시판 하나를 주는 소모임 형태였다. ‘소울트레인’(이후 블렉스로 옮겨 초대 운영자를 맡음)이라는 소모임이 있었다. AFKN에서 나오던 쇼 이름 그대로다. 그때는 힙합이라는 단어도 몰랐고 그냥 랩 뮤직, 펑크 음악에 관심이 갔는데 정보에 너무 목이 말랐다. 혹시나 하고 검색하다 찾았다. 게시판 글을 쭉 보니 나 같은 사람이 많았다. 특정 음반이나 아티스트의 정보를 얻고 싶은 사람들, 그런데 각자 처한 상황은 다 다른 사람들.”
―어떻게 달랐나.
“어떤 친구는 아빠가 해외 출장을 자주 가서 갈 때마다 새로 나온 랩 싱글을 사다 줬다. 1990년대 초 CD가 활성화되고 형편이 괜찮은 집은 CD 플레이어를 장만하던 때다. 그 친구가 ‘아빠가 사준 스눕 독 새 음반이 있다’고 게시판에 올리면 요즘 생각하면 웃기지만 난리가 났다. 그 사람은 게시판의 스타가 된다. 그 음반 하나 듣자고 음감회(음악감상회)를 열면 많을 때는 200명이 모였다. 누가 어렵게 구한 ‘더 소스’ 잡지를 들고 오면 다들 안 찢어지게 한 장씩 조심조심 돌려 봤다. 내가 좋아한 래퍼가 이렇게 생겼구나, 옷은 이렇게 입는구나, 인터뷰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구나. 정보를 거기서 다 얻었다. 그들만의 리그였다. 그 안에서 즐기고, 정보를 공유하고, 양산했다.”
◆IMF, 숨통이 된 힙합
―1990년대 말은 IMF 외환위기와 세기말의 불안이 겹친 시기였다. 그때 청년들이 힙합에서 발견한 건 뭐였나.
“대구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음악과 상관없이 ‘먹고살려면 서울 가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 싶어 부모님 지원으로 홍익대 산업공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하필 홍대로 오는 바람에 당시 움트던 문화와 음악을 함께 겪게 됐고, 거기에 PC통신까지 더해졌다. 졸업해야 할 시점이 1997년이었고 그때 IMF가 터졌다. 우리 과는 주로 대우에 갔는데 한 해 선배가 취업하자마자 퇴사하더라. 취업과 동시에 퇴사라니, 불안감이 커졌다. 학위를 따도 미래가 안 보이는 상황에서 나한테 힙합은 하나의 숨통이었다. 요즘 애니메이션으로 치면 이세계 같은 거다. 현실은 어렵지만 나한테는 희망까지는 아니어도 숨통이 트이는 게 있고, 그건 현실과 무관하게 내가 누리는 거였다. 같이 즐기던 사람들도 비슷했다. 도피라 해도 좋고 가림막이라 해도 좋다. 힙합이 현실의 어려운 부분을 지지해 주거나 조금이라도 위안을 줬다.”
◆A4용지 20박스, “우리말로 랩해야겠구나”
―처음 들은 건 미군 방송이었는데 팀 이름은 가리온이고 가사는 영어 한 줄 없는 한국어였다. 이유가 있었나.
“명확한 이유가 있다. 정보가 너무 없어서 어렵게 찾아다녔다. 대학원 연구실에 있으니 학계는 인터넷이 조금 빨랐다. 넷스케이프 브라우저로 야후 같은 초기 검색 엔진을 뒤져 내가 찾고 싶은 뮤지션의 인터뷰와 가사를 찾았다. 인터뷰는 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서, 가사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너무 멋있으니까 확실히 이해하고 싶어서. 가사 아카이브 사이트에서 다 긁어다 출력했다. 대학원 공용 레이저 프린터 토너를 엄청 써서 교수님한테 혼났다. 출력한 A4 용지만 20박스 넘게 갖고 있다. 가사는 100% 지역마다 다른 슬랭(속어)을 쓰니까 매번 업데이트되는 슬랭 사전을 받아서 가사와 나란히 놓고 ‘이게 무슨 말이지’ 하면서 봤다.”
―거기서 뭘 발견했나.
“공통적으로 얘기하는 게 리얼한 걸 추구하라는 거였다. 리얼함의 추구란 첫째 네가 누군지 알아야 하고, 그걸 솔직하게 드러내고, 거기에 프라이드를 갖고, 계속 지켜가며 발전시키는 것. 그 몇 가지가 뚜렷하게 보였다. 당연히 나는 한국인이고 내가 쓰는 말은 한국어고 한국에 살면서 경험하고 느끼는 것을 가사로 표현하는 게 래퍼가 하는 일의 기본이라는 걸 알고 나니, 당연히 우리말로 랩해야겠구나. 거기서 출발했다.”
◆33년 전 칼럼을 읽다
(기자는 1993년 6월27일자 세계일보 ‘설왕설래’ 칼럼을 건넸다. 힙합을 ‘저질 외래풍조’라 부르며 “흑인처럼 꼰 머리를 하고 헐렁한 옷을 입는 유행을 흉내 내지 말아야 한다”고 썼고, KBS가 레게 머리를 이유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출연을 막은 것을 잘한 결정이라고 평가한 글이다. 그는 일부 소리 내어 끝까지 읽었다.)
―당시 스물두 살이었다. 지금 이 칼럼을 다시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그때 이런 기사 많았다. ‘흑인들의 뒷골목 깡패 문화’라고 표현한 것도 기억난다. 읽다 보니 느낀 건데 ‘흑인들이 도포 입고 판소리를 흉내 낼 수 없듯이 우리도 랩송이나 흑인풍 의상은 흉내 내지 말아야 이치에 맞는다’는 건 지금도 하는 얘기다. 지금도 이런 말 하는 분들 꽤 있다. 심지어 힙합을 즐기는 리스너 중에도 ‘무슨 한국 사람이 힙합이야, 한국인이 힙합을 할 수가 없어’라고 강하게 말하는 분들이 가끔 보인다.”
―30년 전 비판받던 문화가 지금은 정부가 자랑하는 케이팝(K-POP)의 중요한 요소가 됐다. 격세지감은 없나.
“어느 문화나 예술 사조나 다 그런 걸 겪어왔다고 보기 때문에 특이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그리고 방금 말한 것처럼 일반 대중이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곡해하는 건 지금도 여전하니까 그때와 지금 사이에 큰 격세지감을 느낀다고까지는 못 하겠다. 외면적으로야 쇼미더머니라든가, 예전엔 상상도 못 했던 스타 대접을 받는 래퍼들을 보면,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언더그라운드에서 힘들게 활동하다가 지금은 대중에게 사랑받는 위치에서 잘하고 있네’ 정도지, ‘힙합이 이렇게까지 출세했네’ 하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
―세계일보는 이번 기획을 33년 전 칼럼에 대한 일종의 정정보도로 생각하고 있다. 다시 쓴다면 어떻게 써야 할까.
“저질 외래풍조도 있다. 있기 때문에 100% 틀렸다고 반박할 수는 없다. 크게 얘기하면 되게 인간적인 문화다. 인간이 다 옳고 올바르지 않지 않나. 저질도 있고 선비님도 있고 훈장님도 있고 모사꾼도 있다. 힙합이라는 문화에서는 그런 것들을 리얼함 그대로 내놓는다. 굉장히 필터링이 덜 된 장르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에겐 불쾌하고 누군가에겐 내 감정을 찰떡같이 대신 말해주는 게 된다. 물론 그 안에도 우리처럼 문학적 코드를 넣어 필터링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걸 다 걷어내고 날것 그대로 살덩어리를 던지는 사람도 있다. 그 모든 모양새가 인간 본연의 모습을 최대한 여과 없이 드러내는 음악 스타일이다. 그러니 당시 기사를 쓰신 분 입장에서 ‘이건 너무 외래 저질이잖아’ 하는 느낌은 맞는 거다. 굳이 수정까지는 아니고 이해도가 조금 깊어진 측면에서 쓴다면, 이 장르는 인간의 면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특성이 있어서 우리의 모습이 날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해주시면 좋겠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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