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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북한 해군 함정의 기관총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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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6-28 21:17:35 수정 : 2016-06-28 22:3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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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잘 훈련된 소총 사수가 1분에 3∼4발 정도밖에 사격할 수 없었다. 보병부대 화력을 강화하려면 전장에 동원되는 병사 수를 늘리는 수밖에 없었다. 각국의 군 지휘부는 대량의 화력을 기계적으로 제공하는 무기를 만들어내면 전쟁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여겼다. 방아쇠를 당기면 탄환이 연속으로 발사되는 기관총이 발명된 배경이다.

미국인 발명가들이 기관총 개발에 앞장섰다. 미국 남북전쟁 때 윌슨 애거가 발명한 기관총은 겉모습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커피 분쇄기’ 총으로 불렸는데 분당 100발까지 발사할 수 있었다. 남북전쟁이 시작된 1861년 이 기관총 시연을 본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10정을 구입하고 54정을 추가 주문했다. 이듬해 리처드 개틀링이 발명한 개틀링 기관총은 현대적 기관총의 효시로 불린다. 6개의 총열이 원형으로 배치된 이 기관총은 레버를 손으로 돌리면 작동된다. 이어 1884년 하이럼 맥심은 세계 최초의 완전 자동식 기관총을 발명했다. 이 맥심 기관총은 화력이 소총 100정과 맞먹을 만큼 위력적이었다.

당시 대량살상무기로 첫손에 꼽히던 기관총은 전쟁 양상을 바꿔놓았다. 1898년 수단 옴두르만 전투는 기관총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입증했다. 사막의 각 부족들이 모인 이슬람군 5만2000여명은 구식 소총과 칼로 무장한 채 종교적 열정만으로 영국군 진영에 달려들었지만 5시간 만에 전투가 끝났을 때 이들 중 95%는 죽거나 다쳤다. 영국군 사망자는 불과 48명이었다. 훗날 영국 총리가 된 윈스턴 처칠이 ‘모닝 포스트’ 종군기자로 참전해 “지금까지 야만인들에 대해 과학무기가 거둔 승리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하다”고 보도했지만, 현장에서는 비인간적인 학살을 개탄했다. 우리나라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다. 1894년 동학농민군 2만여명이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참패해 여러 날 동안 개천을 피로 물들인 것은 일본군의 신식 기관총 때문이었다.

북한 해군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에 배치된 연안전투함의 노후 기관포를 구경 12.7㎜의 미국산 개틀링 기관총으로 교체하고 있다고 한다. 기관총이라 해서 얕잡아볼 게 아니다. 예전의 기관총과는 차원이 다르다. 분당 2000여발까지 발사할 수 있으며 최대 사거리는 5~6㎞에 달한다. 근접전투 때 우리 해군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북한이 함정에 지상군 무기인 RPG-7 대전차 로켓과 AT-4/5/6 대전차 미사일을 장착한 데 이어 스텔스 기술을 적용하려는 정황도 포착됐다고 한다. NLL 해역은 남북 간 군사충돌 가능성이 상존하는 만큼 심각하게 여겨야 할 사태 진전이 아닐 수 없다.

박완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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