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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46> 진주강씨·신천강씨 등

진주강씨
강감찬 장군 등 배출 ‘뿌리깊은 명문’
해방 후 정·재계·재야인사 대거 나와
신천강씨
주나라 문왕 아들 강숙에서 시작돼
중시조 강지연 ‘신성부원군’ 봉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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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4-02 21:23:17      수정 : 2013-04-02 21:23:17
진주강씨(晉州姜氏)의 근 현대인물들

고구려 강이식 장군을 시조로 하고 있는 진주강씨는 고려시대에는 강감찬·강민첨 장군, 조선시대에는 강희안·강희맹 형제, 병자호란 때는 강홍립 장군이 있고, 김홍도의 스승이었던 강세황이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도 부임하는 일본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 독립운동가 강우석 등이 있어 뿌리 깊은 명문가로 이름을 떨쳤다. 진주강씨는 해방 이후에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정계와 재계는 물론 재야 시민운동에까지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을 꼽으면 정계에서는 강영훈(전 국무총리)·강인택(전 체신부 장관)·강성태(전 상공부 장관)·강서룡(전 교통부 장관)·강경식(전 재무부 장관)·강만수(KDB금융지주 회장) 등이 있으며, 국회의원으로는 강창희(현 국회의장)·강재섭(전 한나라당 대표)·강기갑(전 의원)을 비롯하여 40여명에 이른다.

종교계와 시민사회단체 쪽에서는 강신명(전 숭실대 총장)·강원룡 목사(경동교회 전 명예목사)·강석주 스님(전 조계종 총무원장) 등이 있으며, 법조계에는 강우영(전 대법원판사, 변호사)·강안희(전 대법원 판사, 변호사)·강지원(변호사) 등이 있다.

학계에서는 강구식(전 서울대 법대 교수)·강문주(경제학박사, 전 중앙대 부총장)·강병근(정치학박사, 전 연세대 법정대학원장)·강병규(정치학박사, 전 한성대 학장) 등이 있고, 재계에서는 강덕수(STX그룹 회장)·강신호(동아제약 회장)·강정준(백화양조 회장)·강성진(전 삼보증권 사장)·강계중(광일상사 사장, 재일거류민단 상임고문)·강진구(전 삼성전자 사장)·강남형(해태제과 사장)·강석진(전 동명목재 회장) 등이 있다. 또한 강부자(탤런트)·강수진(발레리나)·강제규(영화감독)·강신성일(영화배우, 전 국회의원)·강호동(MC, 씨름선수)·강동희(농구선수)·강수지(가수)·강선영(고전무용)·강소천(아동문학가) 등도 진주강씨의 후손들이다. 

정릉의 신덕왕후 강씨 묘역. 신덕왕후는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으로 이성계가 왕권을 얻기까지는 강씨와 신천강씨의 후원이 지대했다. 강씨는 슬하에 아들 둘(방간·방석)과 딸(경순공주)을 두었는데, 자신의 아들인 방석이 제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왕자의 난이 벌어지기 1년 전에 병사했다. 곧이어 왕자의 난이 일어나 두 아들은 죽고, 딸은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원래 신덕왕후 강씨의 묘와 흥천사는 덕수궁 근처인 정동에 있었으나 태종이 정릉으로 옮겼고, 절은 유생들에 의해 불에 탔다. 그 후 흥천사는 신덕왕후 강씨의 묘가 있는 정릉입구로 옮겨져 중창되었다.
신천강씨(信川康氏)는

신천강씨는 황해도 신천과 재령 등지를 본관으로 하는 강(康)씨를 말한다. 제주에도 신천강씨에서 갈라져 나간 제주강(康)씨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강’이라는 동음이의를 갖는 성씨가 있는데 모두 5가지이다. 그중 대부분은 성강(姜)이라는 한자를 쓰는 강씨이며, 그 외가 강(康)·강(强)·강(剛)씨이다.

그중 편안할 강(康)을 쓰는 본관은 신천강씨를 비롯하여 곡산강씨(谷山康氏)·재령강씨(載寧康氏)·제주강씨(濟州康氏)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충원·진주 등 10여개 본관으로 흩어져 있는데, 모두 신천강씨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요즈음엔 신천으로 통합하여 관리하고 있다.

신천강씨는 ‘신천강씨대동보(信川康氏大同譜)’에 의하면 중국 주나라 문왕의 아들이며 무왕의 동생인 강숙(康叔)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강씨의 시조는 강숙의 둘째아들 강후(康侯)의 67대 손이라고 전하는 강호경(康虎景)이다.

강(康)씨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기자가 조선에 들어올 때 함께 들어왔다고 전하고 있으나 고증할 길은 없다. 따라서 신천강씨는 강호경을 시조로, 강지연을 중시조로 삼고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강호경은 고려를 창건한 왕건의 외가 쪽 7대조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고구려 출신 신라의 장군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 관한 기록은 고려 의종 때 검교군기감으로 있던 김관의(金寬毅)가 쓴 ‘편년통록(編年通錄)’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편년통록’은 현재는 전하지 않고, ‘고려사’를 통해 고려건국 이전의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는 고구려의 유민 출신으로 자칭 성골 장군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그가 백두산에서부터 유람을 한 뒤 부소산 골짜기에 자리 잡았는데, 왕건의 증조부인 왕국조가 강호경의 4대손인 강보육의 딸과 혼인하고 송악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강호경이 아들 강충(康忠)을 낳았으며, 강충은 이제건(伊帝健)·보전(寶甸)·보육(寶育)을 낳았다. 강보육의 딸 진의가 당나라 귀족 왕국조와의 사이에서 왕건의 조부인 의조 작제건을 출산한 것이다. 강호경의 14세손이 신천강씨의 중시조인 충렬공 강지연(康之淵)이다.

신천강씨의 중시조인 강지연은 몽골이 고려를 침략해 최씨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할 때 국왕을 호종한 공로로 호종공신(扈從功臣)이 되었고,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이후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신성은 황해도 신천(信川)의 옛 이름. 이로써 신천은 본관으로 정하게 되었다.

강지연의 6세손 강윤성(康允成)은 고려 충혜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등을 역임하여 강씨 문중이 번성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서울 관악산 기슭에 있는 강득룡의 묘. 강득룡은 신덕왕후 강씨의 사촌오라버니로 신천강씨 재령파의 파조가 된다. 관악산 연주대는 원래 이름이 의상대였지만, 고려가 망한 뒤 그가 개성을 보며 통곡했다고 해서 연주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신천강씨는 곡산파·재령파·제주파 등으로 나뉘는데, 강지연의 6세손인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을 파조로 하는 곡산파와 8세손인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 강득룡(康得龍)을 파조로 하는 재령파(載寧派)로 나뉜다. 또 조선시대에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낸 영암공(瀛巖公) 강영(康永)은 제주강씨(濟州康氏)의 입도시조(入島始祖)가 되었다.

신천강씨는 조선시대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 36명이며, 현재 우리나라엔 1만3909가구에 총 4만42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2000년 통계청 발표).

‘신천강씨의 연혁과 인물

신천강씨의 대표적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강지연(신천강씨의 중시조)의 6세손 강윤성은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학사와 이부시랑(吏部侍郞)을 거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다. 그의 딸이 이성계의 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 방번·방석과 경순공주를 낳았음)이다. 신덕왕후의 묘는 지금의 덕수궁 근처에 있다가 태종에 의해 정릉으로 옮겨졌으며, 그를 기리던 사찰도 옮겨졌다(지금의 성북구 흥천사).

강지연의 8세손인 안릉부원군 강득룡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지내다가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관악산 의상대에 올라가 개성을 향해 통곡하니, 이때부터 이곳은 연주대(戀主臺)라 불렸다. 태조가 그를 안릉부원군에 봉하고 안정공(安靖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후손이 재령파를 형성했다. 그의 아우 강순룡(康舜龍)은 고려 공민왕 때 찬성사지밀직사사로 은성부원군(銀城府院君)이었다가 조선 건국에 따라 보국숭록대부에, 신천군(信川君)에 봉해졌다.

강원기(康元紀)는 신덕왕후와 4촌으로 강윤의(康允誼)의 아들이다. 길재(吉再)·권근(權近)·정몽주(鄭夢周) 등과 어울렸다. 하지만 이태조 등극에 반대하여 은거해 버렸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또한 제주 입도시조인 영암공 강영은 신덕왕후의 사촌오라버니로 전라감사를 지냈으며, 왕자의 난(조선 개국 초 태조의 아들 방원과 방간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으킨 두 차례의 난)이 일어나자, 제주로 피신하여 일생을 마쳤다. 그 후손이 제주강씨를 형성하게 되었다. 

신덕왕후를 모신 흥천사 극락보전.
그 외에 신천강씨에는 고려의 무신이었던 강조(康兆)가 있다. 그는 도통사(都統使·각 도의 군사를 통솔하는 무관직 벼슬)를 지냈으며, 강증(康拯)은 음보로 벼슬길에 올라 예종(睿宗) 때 평장사를 역임했다. 그 후손이 강령강씨(康翎康氏)이다.

조선시대에는 강윤성의 증손인 강순(康純)이 있다. 그는 단종 때 회령 부사를 거쳐 판의주목사를 지낸 뒤, 세조 때 첨지중추원사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어유소(魚有沼)와 함께 공을 세워 적개일등공신으로 신천부원군(信川府院君)에 봉해졌다. 하지만 남이 장군 친분이 있었던 강순은 남이 장군과 함께 역모를 꾀한다는 유자광의 계략에 말려 함께 처형되고 말았다.

이렇게 신천강씨는 왕자의 난과 남이 장군 역모사건에 휘말려 대대적인 탄압을 당하고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강곤(康袞)은 세조 때 정란공신으로 중추부사에 이르고 신천군에 봉해졌다. 다시 성종 때 익대공신이 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강중진은 어려서 김종직에게 학문을 배우고 연산군 때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성주목사를 지냈다. 강중진의 손자 강유선은 명종 때 학자로 이름을 떨쳤고, 그의 아들 강복성은 노사신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인조 때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현대 인물로는 노무현 정부 때 법무부 장관을 지낸 강금실(康錦實, 변호사)과 만화가 강풀(본명 강도영 康道永) 등이 있다. 

신천강씨 재령파의 파조인 강득룡의 묘역에서 거행된 신천강씨 시향.
괴산강씨(槐山强氏) 충주강씨(忠州强氏)

강(强)씨는 중국 진나라의 대부 강일(强?)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인물로는 송나라 휘종 때 강준(强浚)과 이종 때 강경순(强警巡)·강신(强伸) 등이 전해온다. 우리나라에 어떻게 들어왔는지에 대해선 문헌이 없다. 다만 ‘조선씨족통보’에는 송나라 휘종 때 강일의 후손인 강준명(强浚明)에 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강(强)씨의 본관은 충주와 괴산이 있으며, 인구 수는 2000년에 기준 531가구 1620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괴산 장연강(剛)씨

강(剛)씨는 중국 청나라 덕종 때 사람인 강의자(剛毅字)의 아들 강량(剛良)의 후손으로 전한다.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그는 만주인으로 공부상서를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한국의 강씨로는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충북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에 강응룡(剛應龍)이 살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진주강씨(晋州彊氏)

진주강(彊)씨는 문헌이 실전되어 상고(詳考)할 수 없으며 시조와 관향의 내력에 대해서도 미상이다. 1930년 국세조사 때 경남 통영군 광도면 우동리에 강선악(彊善岳)의 1가구가 살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1만명이 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는 성강(姜)을 쓰는 진주강씨와 혼동된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현재로는 명확한 인구 파악이 어려운 실정이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바로잡습니다

지난 호에서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강씨는 모두 4개라고 했는데, 강(彊)까지 있는 것으로 확인 되어 모두 5개의 성씨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또한 강백이는 고죽국 왕자였던 백이숙제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요순시대 제후였던 강백이를 의미하며, 진시황의 성씨는 진나라 왕실의 성씨인 영(?)이라는 설과 여불위의 자식이기 때문에 여(呂)씨라는 주장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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