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층에 휘둘려 민생 뒷전
여권도 이념논쟁만 부각시켜
‘중도의 힘’ 어느 때보다 중요
200일 앞으로 다가온 22대 총선은 기존 선거 전략 문법을 바꿀 것 같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선거에서 승패를 가른 열쇠말은 중도층이었다. ‘중도로 확장’은 선거 필승 방정식이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선거 전략의 상수였다.
19대와 20대 총선은 드라마틱하게 각인된 선례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 임기 말 레임덕 속에 치러진 19대 총선에서 여권은 암울했다.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사건 후폭풍과 친이(친이명박)계와 친박(친박근혜)계의 내홍으로 필패 기운이 완연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 보니 새누리당이 43.3%의 득표율로 152석을 얻었다. 구원투수로 등판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김종인 박사를 영입해 강령까지 확 바꿔 ‘경제민주화’로 중도 표심을 파고든 게 주효했다. 당시 서울과 경기, 인천의 지역별 비례대표 득표에서 새누리당이 민주통합당을 앞섰다.

데자뷔인 듯 4년 후 20대 총선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이 이 전술을 차용했다.
총선을 앞두고 안철수의 국민의당이 창당돼 호남과 중도층을 파고들자 민주당은 크게 흔들렸다. 그때 문재인 대표는 19대 총선의 박근혜처럼 김종인 카드를 빼 들었다. 적진의 책사를 삼고초려해 영입한 스토리와 경제민주화 이슈 선점으로 중도를 공략했다. 결과는 수도권 압승, 충청·PK(부산·경남) 선전을 바탕으로 텃밭인 호남을 국민의당에 내주고도 1당에 안착했다.
총선뿐인가. 지난 대선 윤석열 대통령의 승리를 견인한 것도 중도층 민심이었다. 윤 대통령은 정치에 입문해서 정치 혁신 구상으로 ‘캐치올 파티(catchall party)’를 제시한 바 있다. 캐치올 파티는 특정 계급이 아닌 국민 전체를 대표하고자 하는 정당이다.
무당층이 최근 주요 여론조사에서 30% 안팎으로 나온다. 역대 최대 수준이다. 그런데 여의도는 요즘 거꾸로 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중도로 외연을 확장하기는커녕 갈수록 강성 지지층의 목소리만 커지고 있다. 사법리스크를 안고 출범한 이재명 대표 체제의 숙명이지만 이 대표 체포동의안 가결 이후엔 이제 물길을 돌리기조차 어려워졌다. 친명(친이재명)계의 비명(비이재명)계 때리기는 광풍 수준이다. 색출과 축출 등 분열의 언어가 난무한다. 밀정과 매국노, 친일파 등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감정의 골이 너무 깊어져 내홍을 수습하고 힘을 합쳐 총선을 치를 수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다.
그 결과 처리가 눈앞이던 민생 법안이 미뤄진 책임을 민주당이 오롯이 떠안게 됐다. 친명계의 압박 속에 박광온 원내대표가 사퇴하면서 제1당 원내 리더십에 공백이 생겼고 국회는 ‘올스톱’됐다. 당장 잇따르는 강력범죄로 인해 탄력이 붙었던 특정중대범죄 피의자 신상정보 공개법(머그샷법)은 이달 본회의 처리가 무산됐다. 영아 유기 사건으로 그 필요성이 제기됐던 보호출산제 도입 법도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한 상태다. 환자가 직접 병원 등을 방문해 서류를 발급받지 않아도 실손의료보험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보험업법 개정안도 마찬가지다.
여권도 만만치 않다. ‘공산 전체주의’ 발언과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등 이념 논쟁이 부각되면서 중도층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이념 논란은 보수층은 결집해도 중도층은 외면하는 이슈다.
이대로면 내년 총선은 중도 확장 전략이 방기된 채 치르는 첫 선거로 기록될 수도 있겠다. 여야의 내로라하는 선거 전략가들이 왜 이런 ‘비합리적’인 선택에 제동을 걸지 않는 걸까. 답은 정치공학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신기루처럼 애매한’ 중도층보다는 손에 확 잡히는 집토끼에 공을 들이는 게 승률이 높다. 선거는 어차피 적보다 한 골만 더 넣으면 되는 상대평가여서다. 그러니 자기 진영만 결집하고 정치혐오를 양산해 무당층이 투표를 포기하게 하는 ‘낮은 투표율’ 전략을 노리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선거 결과 어느 쪽이 이기더라도 중도층은 배제되고 만다. 내년 총선 결과가 한국 정치 극단의 시대의 서막일 수도 있는 셈이다. 투표로 중도의 힘을 보여 주는 심판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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