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4일 바티칸 성베드로광장. “내가 일흔이 된 걸 다들 눈치채신 것 같네요.” 레오 14세 교황의 가벼운 농담에 웃음이 번졌다. 그의 70회 생일이었다. 광장에는 영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로 축하 문구가 내걸린 채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신도들이 정오 축복을 기다렸다. 멀리 남미 페루에서 온 신자들은 전통복장을 하고 춤으로 감사와 기쁨을 표현했다. 20년 넘게 선교사로, 주교로 봉사한 땅에서 온 인사였기에 교황의 눈빛은 더욱 그윽해 보였다. 그의 평화는 거창한 선언보다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언어와 경계심을 낮추는 미소에서 출발한다. 유머가 공기를 바꿀 때 비로소 진지한 대화가 들어설 자리가 생긴다. 이 소박한 순서가 그가 제시한 평화의 첫 문장이다.
하루 뒤 공개된 인터뷰는 이 미소의 방향을 또렷이 했다. 그는 일론 머스크의 초대형 성과 보상안을 들어 극단적 부의 집중과 불평등을 경고했다. 과거 CEO 임금이 노동자보다 몇 배이던 것이 지금은 수백 배까지 벌어진 현실, 그리고 1조 달러(약 1400조원)에 육박하는 보상안의 상징성은 우리가 무엇을 가치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지를 묻는다. 돈이 유일한 잣대가 되는 순간, 가족·공동체·노동의 존엄은 숫자의 뒷줄로 밀린다. 레오 14세의 ‘일흔의 미소’는 이 잣대를 다시 그어 보자는 초대장이나 다름없다.

그가 평화를 말하는 방식은 ‘옹호’와 ‘중재’를 구분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교황청은 전쟁 당사국 누구의 대변인도 아니어야 하며,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자리에 서야 한다. 그는 평화의 원칙을 분명히 옹호하되, 중재의 가능성을 위해 중립의 신뢰를 보존하려 한다. 중재는 쌍방이 받아들일 때만 성립한다는 냉정한 사실을 알기에 공개 발언의 톤은 절제된다. 이 절제가 때로 ‘소극성’으로 오해받지만, 그가 택한 길은 규범을 단호히 지키면서도 언제든 대화로 돌아올 길을 남겨 두는 태도다. 민간인 보호, 포로 교환, 아동 송환 같은 인도주의 과제에는 적극 힘을 모으고, 합의가 무너져도 연락선만은 남겨 둔다. 이는 전쟁을 막는 적극적 기술이다.
레오 14세의 평화는 환대의 문법이다. 성베드로광장을 가득 채운 다언어의 풍경은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그의 언어’로 불러 주는 공동체의 태도다. 그의 평화는 상대를 내 쪽으로 동화시키기보다 상대가 선 자리에서 존엄을 인정하고 말을 거는 일이다. 언어의 다양성을 평화의 조건으로 읽는 감수성 앞에서 혐오의 언어는 설 자리를 잃는다.
그가 젊은 날, 페루의 교구와 마을에서 보낸 경험이 평화의 지도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폭력의 씨앗은 변두리에서 자라며, 그것을 뽑으려면 경제적 취약과 교육, 결핍과 건강 위기를 함께 돌보는 ‘완만하지만 누적되는 정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의전보다 현장, 회의보다 얼굴을 먼저 찾는다. 평화는 조약만으로 오지 않는다. 우물과 학교, 진료소 같은 작은 인프라에서 자란다.
그의 의제는 생태와 난민을 한 축으로 묶는다. 기후 재난은 분쟁의 뇌관이 되고, 강제 이주는 사회의 경계를 파열시킨다. 그는 피난민의 안전한 통로와 지역 사회의 상호부담, 에너지 전환과 빈곤 완화를 함께 설계하는 ‘정의로운 전환’을 평화정책의 중심으로 당겨 놓았다. 군축만으로 평화가 완성되지 않는다면, 생태적 안전망과 사회적 연대가 그 빈자리를 메워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평화는 속도의 유혹을 거부하는 느림에서 완성된다. 박수와 성과 지표에 민감한 시대에 그는 한 사람을 위해 시간을 멈추는 법을 안다. 감사의 말을 절제해 꺼내고, 반대자에게서도 선의를 찾으려 애쓴다. 정치적 수사보다 관계의 복원을 우선순위에 두는 태도야말로 ‘일흔의 미소’가 품은 힘이다.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