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감시·고발 보도 힘 빼는
與 언론 옥죄기 법 자가당착
여론 움직일 ‘필풍’ 건재해야
이전 사무실에 ‘筆風解慍(필풍해온)’이라고 쓰인 서예 작품이 걸려 있었다. 창간 14주년 기념작으로 서예가 필력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붓(글)에서 나오는 기운(바람)이 답답함을 풀어준다는 뜻 정도로 풀이된다. 중국 고사에서 유래했다고 짐작될 뿐 정확한 출처를 찾지는 못했다. 붓(글)의 바람으로 국민들의 답답함, 분노, 억울함을 풀어주는 게 언론 소명이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내 나름대로 해석했다.
필풍 세기가 예전 같지 않다. 영상·디지털 문화가 득세하면서 활자 매체 입지가 좁아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각자 주장을 펼치는 시대다. 미디어 정책을 좌우하는 최민희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 위원장은 한 유튜브에 출연해 “이제 언론의 힘이 빠졌다”고 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부처 업무보고에서 “요즘은 재래식 언론이라고 하던데, 특정 언론들이 스크린해서 보여주는 것만 보이던 시대가 있었다.(중략) 지금은 실시간으로 다 보고 있지 않냐”고 했다. 전통(레거시) 언론이라는 가치중립적 표현을 재래식 언론으로 바꿨다. ‘퇴물’ 프레임이다.
누구나 주장한다고 뉴스가 되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필풍의 가치는 바람에 있다. 사람들과 공동체에 의미 있는 이슈를 발굴하고 보이지 않는 곳을 들여다보고 여론을 만드는 의제 설정 기능이 전통 언론의 핵심이다. 언론계와 시민단체, 야당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난 주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한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은 필풍을 꺾을 우려가 크다는 점에서 악법이다. 여당 주장과 달리 ‘허위·조작정보’를 근절하지 못할 뿐 아니라 언론이 권력을 감시하고 국민 알 권리를 대변하는 데 장벽이 될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진 최고 권력자 주변 의혹은 물론 조국 사태 같은 고위 공직자 가족 특혜 의혹, 정치 스캔들로 번진 대장동 개발 비리 사건 연속 보도가 지금처럼 이뤄지기 어렵다. 세월호·이태원 참사 등 대형 재난 보도도 마찬가지다. 권력자나 관계자, 정부·지자체가 일부 내용이 허위라면서 온라인 플랫폼에 삭제·차단을 요구하고 언론사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하면 후속 보도는 주춤할 수밖에 없다. 개정법이 권력자에 대한 공공 이익을 위한 정당한 비판은 징벌적 손배 대상에서 제외했다지만 ‘공공 이익’이라는 모호한 잣대가 늘 언론에 유리하게 적용되진 않는다.
특검 수사로 확인된 ‘채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 보도는 2년 전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전언’으로 시작됐다. 당시 대통령실 공식 입장은 “사실무근”이었다. 비서 3인방과 비선 의혹 보도를 ‘지라시’로 몰아붙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에 헌법재판소는 “오히려 의혹 제기를 비난함으로 국회 등 헌법기관에 의한 견제나 언론에 의한 감시 장치가 제대로 작동될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번 개정법은 아예 권력자와 기관이 보도 초기에 개입할 길을 합법적으로 열어놓았다.
여당은 이 정도로는 불안했는지 논평·사설·칼럼에 대해서도 반론 청구를 하고 입증 책임을 언론에 지우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추진 중이다. 자신들에 불편한 보도를 기필코 막겠다는 결의가 느껴진다. 진보지를 표방하는 매체마저 사설에서 “과도한 ‘입틀막’” “마이동풍식 오만함”을 질타했지만 꿈적하지 않는다. 국제무대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K민주주의를 자랑하는 정권이 권위주의 국가에나 있을 법한 언론 재갈법을 추진하는 현실이 기괴하다.
역대 정권을 겪으며 국민들은 ‘선한 권력’은 없다는 걸 안다. 100% 확신하는 권력자, 정권은 더 두렵다. 조금의 비판도 허용하지 않고 내 편 아닌 자는 적으로 삼는 탓이다. ‘위험한 민주주의’ 저자 야스차 뭉크는 “어떠한 권력에도 유해한 발언을 금지하는 권한을 부여해선 안 된다”고 썼다. 유해하든 무해하든 발언을 금지하는 권력이 등장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흔들린다는 경고다. 입법·행정 권력을 얻은 정권이 사법부에 이어 언론까지 옥죄려 한다. 견제와 균형 원칙이 무너지면 힘의 논리만 남는다. 종국에 기울어진 판을 움직이는 건 여론이다. 필풍이 건재해야만 하는 이유다.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황정미칼럼] 筆風解慍 <필풍해온>](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2/29/128/20251229516821.jpg
)
![[설왕설래] 삼성의 독일 ZF ADAS 인수](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2/29/128/20251229516848.jpg
)
![[기자가만난세상] 낯선 피부색의 리더를 만난다면](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2/29/128/20251229516765.jpg
)
![[기고] 서울형 키즈카페가 찾아준 ‘놀 권리’](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2/29/128/20251229516751.jpg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