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장, 제청 미루며 “계속 협의”
청와대는 관심 없다는 듯 침묵 일관
이럴 거면 대법관 수 뭐하러 늘렸나
김대중(DJ)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 3월3일 고건 국무총리가 청와대에서 DJ와 독대했다. 새 정부 총리 후보자가 아직 국회 인준을 못 받은 가운데 DJ는 지난 정권 때 취임한 고건에게 국무위원 임명 제청을 부탁했다. 훗날 회고록에서 고건은 “대통령은 서류 한 장을 들고 앉아 (장관들 이름을) 쭉 읽었다”며 “내 앞에 명단이 적힌 종이는 없었다”고 술회했다. 이어 “대통령과 총리 간 장관 인선 논의가 ‘협의’보다는 ‘통보’에 가까웠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풍경”이라고 덧붙였다. 총리의 임명 제청권이 유명무실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우리 헌법은 총리 외에 감사원장과 대법원장에게도 임명 제청권을 부여했다. ‘감사위원은 원장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98조 3항)와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104조 2항)라는 규정이 그렇다. 얼핏 감사원장의 제청도 총리처럼 요식 행위일 것 같다. 그런데 2020년 이례적 상황이 벌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선택한 감사위원 후보자의 제청을 최재형 감사원장이 여러 차례 거부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온 것이다. 청와대는 “인사권은 대통령에게 있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헌법상 감사원장의 제청이 없으면 대통령의 임명 강행도 불가능하다. 결국 해당 후보자는 낙마하고 말았다.
총리나 감사원장과 달리 대법원장의 제청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대법원장이 비공개로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대법관 후보자 이름을 건넨다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물론 사전에 대법원과 청와대 간 협의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 ‘협의’의 내막이 공개된 적은 없다. 군사 정권 시절엔 대법원장이 복수의 후보자 명단을 제시하면 대통령이 직접 낙점했다고 한다. 1988년 민주화 이후로는 단수 제청이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는 얘기도 있다. 전현직 대법원장들이 입을 열지 않는 한 확인은 어려울 것이다.
대법관 한 자리가 공석이 된 지 오늘로 78일째다. 3월3일 노태악 대법관(현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임기 만료로 물러난 뒤 후임자가 임명되지 않아서다. 노 대법관 퇴임 이전에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가 조희대 대법원장에게 네 명의 후보를 추천했다. 대법원장이 그중 한 명을 골라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절차만 남았는데, 이것이 하염없이 지체되고 있다. 조 대법원장은 3월 초 “(청와대와) 계속 협의를 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선 말문을 닫았다. 그러는 사이 이흥구 대법관의 임기 만료가 3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다. 법조계에선 대법관 두 명의 후임자 인선이 동시에 이뤄지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나온다. 대법원장이 대법관 임명을 대통령에게 제청해야 할 헌법적 의무를 저버린다면 심각한 직무유기다.
청와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도 묻지 않을 수 없다. 헌법상 대법관 임명권자는 대통령이다. 대법원장이 제청을 안 하면 대통령이 ‘헌법에 따라 절차를 밟으라’는 권고를 대법원장에게 하는 것이 정상 아니겠는가. 정부·여당이 “대법관 부족 탓에 재판 적체가 심각하다”며 대법관을 두 배 가까이 늘린 것이 엊그제 일이다. 그러면서 당장 시급히 메워야 할 대법관 공백은 방치하니 이런 모순이 또 어디 있겠나. 대통령이 계속 침묵을 지킨다면 대법관을 임명해야 할 헌법적 의무를 외면하는 것으로 이 또한 직무유기라고 하겠다.
조 대법원장은 2023년 윤석열 대통령에 의해 임명됐다. 그는 대선 직전인 2025년 5월 당시 민주당 후보이던 이재명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에서 유죄 취지 의견을 냈다. 이 대통령으로선 지난 정권 사람인 데다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린 조 대법원장이 마뜩잖을 수 있다. 청와대 참모진과 민주당 강경파 의원들은 조 대법원장을 향한 미움이 어쩌면 이 대통령 본인보다 더 클지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헌법만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우리 헌법이 대법원장 임기를 대통령(5년)보다 긴 6년으로 정한 것은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신분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는 점은 법률가인 이 대통령도 잘 알 것이다. 지금은 공석인 대법관 한 자리부터 채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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