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일수록 권력을 내려놓을 때 알아야
[시나리오1] 서경의 군사책임자 강조(康兆)는 급히 와서 왕을 호위하라는 왕명을 받고 수도로 향했다. 그런데 도중에 그 왕명이 거짓이며 국왕은 이미 죽었고, 권신이 권력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회군했다가 다시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개경을 향했다. 왕은 죽었지만 권신으로부터 나라를 구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개경 근처에 이르러 국왕이 살아 있음을 알고 고민에 빠진다. 진군과 회군 사이에서 망설이는 그에게 휘하 장수들이 “여기까지 왔으니 그만둘 수 없다”며 부추겼다. 강조는 개경 진입을 결정한 뒤, 왕에게 상황을 알린 다음, 수도에 들어가 권신과 그 세력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불러들인 국왕마저 폐위하고 새 임금을 옹립했다.
[시나리오2] 왕의 이종사촌인 대량원군(훗날 현종)은 권신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머물던 천추전에 불을 지르고, 자신이 독살 위기에 처했다는 비밀 편지를 국왕에게 보냈다. 이를 믿은 목종은 대량원군을 개경으로 불러들이는 한편, 서경의 군사책임자 강조에게 군사를 이끌고 오도록 명했다. 그러나 개경 인근에 도착한 강조는 대량원군 세력에 포섭되어 왕을 교체하는 데 가담한다. 결국 대량원군은 새 왕으로 즉위하고, 전왕의 죽음은 강조에게 떠넘겨진다.
시나리오 1은 ‘고려사’의 서술에 따른 것이다. 이 관점에서는 천추전 화재를 우연한 사건으로 보고, 목종이 정사를 소홀히 하는 사이 김치양 일파가 왕위 찬탈을 꾀하자 이를 막기 위해 강조를 불러들였다고 설명한다. 강조는 회군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수도로 진격하여 정권을 장악했고, 끝내 권좌에서 내려오지 못한 채 전왕의 시해까지 주도하였다. 즉 사건의 출발은 목종이었지만, 이후의 전개는 강조가 이끈 ‘강조의 정변’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시나리오 2는 현대 일부 연구자들의 해석이다. 이 관점에서는 강조를 정변의 주도자가 아니라 대량원군 세력에 의해 이용된 인물로 본다. 천추전 화재 역시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대량원군 측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해석한다. 이들은 뜻밖에 국왕의 호출을 받고 출병한 강조라는 강력한 군사지휘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를 자신들의 계획에 끌어들였다. 강조는 대량원군을 옹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지만, 즉위가 끝난 뒤에는 모든 책임을 떠안는 존재로 남게 된다. 전왕의 시해 역시 현종이 아니라 측근 세력이나 강조가 주도한 것으로 처리되어, 새 왕의 정당성에는 흠이 남지 않았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 전자는 그를 반역자로, 후자는 권력투쟁에 이용당한 희생양으로 본다. 고려 전기의 사료가 충분하지 않은 만큼 어느 한쪽만이 진실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결정적인 순간에 보인 그의 언행은 분명하다. 거란 황제가 ‘전왕 시해’를 명분으로 침입했을 때 그는 스스로 총사령관이 되어 맞서 싸웠다. 포로가 된 뒤에도 항복을 거부하며 “나는 고려인이다”라고 말했다. 전왕 목종에게는 반역자였을지 모르나, 고려에는 충신이었던 셈이다. 그가 그저 권력욕에 사로잡힌 인물이었다면 김치양 등을 제거한 직후 스스로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실제로 군사들은 그를 추대하려 했지만, 그는 왕위를 계승할 군주를 기다렸다.
정작 아쉬운 대목은 그 이후다. 그는 전왕을 제거한 뒤에도 권좌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의사결정 기구와 인사권을 장악하며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바로 여기서 강조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돌이켜보면 강조는 두 번의 질문 앞에 서 있었다. 첫 번째는 수도로 진격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때 필요한 질문은 “이 결정은 공동체를 위해 꼭 필요한가?”였다. 두 번째는 새 왕이 즉위한 뒤에도 권력을 계속 쥘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때 필요한 질문은 ‘내 역할은 어디에서 끝나야 하는가?’였다. 결국 강조의 실패는 후자, 즉 권력을 내려놓을 출구를 미리 설계하지 못한 데 있었는지 모른다. 위기의 시대일수록 중요한 것은 권력을 잡는 능력이 아니라 내려놓을 시점을 아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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