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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타워] 양심까지 보험처리 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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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미 산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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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긁힘에도 범퍼 교체… 억울한 사례 반복

주차 전쟁에 시달리는 서울 노원구의 한 구축 아파트에는 늘 같은 자리에 세워져 있는 낡은 수입 자동차가 있다. 테트리스 블록처럼 차량을 맞물려 세워야 하는 비좁은 지하주차장 한구석에 그 차는 붙박이처럼 자리를 지켰다.

최근 새벽 5시쯤, 어둑어둑한 주차장에서 블록 빼기 하듯 차를 이동시키던 친정엄마는 그 차에 바짝 붙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곧바로 뒤로 빼고는 내려서 살펴보니 상대 차량의 앞범퍼에 큰 흠집이 나 있었다. 중요한 일정 때문에 당장 이동해야 했던 엄마는 다급한 마음에 차주에게 연락을 남기고 현장을 떠났다. 이른 시간이라 통화 연결은 되지 않았다.

이현미 산업부 차장
이현미 산업부 차장

3시간 뒤 돌아와서 두 차를 확인해보니 우리 차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미세한 스크래치라도 있나 싶어 손으로 쓸어보고 휴대폰 불빛까지 비춰봤지만 실오라기 같은 자국조차 찾을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엄마가 자신이 냈다고 생각했던 상대 차량의 흠집은 밝은 상태에서 보니 오래된 상처로 보였다. 칠이 벗겨져 드러난 성인 검지 손가락만 한 철판은 이미 검게 변색돼 있었고 오랜 시간 먼지와 마찰에 닳은 듯 흠집의 가장자리가 매끈했다. 뾰족한 사물에 깊게 긁힌 것 같은 가늘고 긴 상처가 앞범퍼 전체에 가득했다.

뒤늦게 연락을 확인한 해당 차주는 기존 흠집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 일로 미세하게 새로운 스크래치가 난 것 같다며 보험 접수를 해달라고 요구했다. 우리 차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다고 해도 “그러면 왜 전화했느냐?”면서 자신의 눈에는 새 흠집이 보인다고 주장했다.

보험 접수를 해주지 않으면 경찰에 고소할 태세였다. 보험사가 시시비비를 가려주길 바라며 접수를 하자, 해당 차주는 서울 강남구 방배동에 있는 수입차 B사가 직접 운영하는 센터에 차를 맡겼다. 이번 일과 무관한 자동차 제조사를 언급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지만, 보험사 직원 말로는 현대자동차로 따지면 수원하이테크센터에 맡긴 것과 같다고 했다. 길에서 옷깃이 스칠 뻔했던 행인이 갑자기 나가떨어지더니 중대한 상처가 났다며 상급종합병원에 입원한 격이었다.

이후 처리 과정은 납득하기 어렵게 진행됐다. 보험사에선 접촉 여부를 전혀 따지지 않은 채 “자동차 제조사 직영 센터에 입고되면 대부분 범퍼를 통째로 교체한다”고 했다. 우리 차 방향을 비추는 주차장 폐쇄회로(CC)TV는 없었고, 블랙박스에도 충격이 감지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시시비비를 따지고 잘못한 만큼만 책임을 지고 싶었으나 일흔의 엄마를 경찰서에 드나들게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보험사에 “왜 범퍼를 갈아야 하냐”고 억울함을 호소하자, 담당 직원도 “업무상 수많은 사고 처리를 하는데 이 정도로 양심 없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다”며 혀를 찼다.

결과적으로 30대 중반의 해당 차주는 범퍼카처럼 타고 다닌 2013년식 세단 앞범퍼를 통째로 갈았고, 수리 기간 우리 보험사 비용으로 동급의 수입차를 빌려서 타고 다녔다. 300만원가량의 비용이 들었다. 수리 이후 그 차는 또다시 망부석처럼 매일 같은 자리에 세워져 있다.

금융감독원은 2016년 가벼운 긁힘처럼 차량의 기능과 안전에 영향을 주지 않는 손상의 경우 범퍼 교체가 아닌 복원수리비만 지급하도록 자동차보험 표준약관을 고쳤다. 그러나 접촉 여부와 새로 생긴 손상의 범위조차 가리지 않는다면 그 약관은 유명무실해진다. 보험사가 인과관계를 확인하고 정비업체의 수리 범위를 검증하는 절차를 강화하지 않으면, 잘못한 만큼만 책임지려는 사람이 오래된 손상까지 떠안는 억울한 사례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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