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만기친람·‘예스맨’ 경제팀 조합 탓
관료 자율 키운 DJ 믿음 용인술 필요
이념·정파 떠난 실용의 초심 복원해야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이념과 진영을 가리지 않은 용인술로 정평이 나 있다. 백미는 DJ가 경제 해결사로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를 발탁한 게 아닌가 싶다. 보수성향의 정통관료 출신인 이 부총리는 DJ정부에서 금융감독위원장과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2년 반 동안 일했다. 두 사람은 딱 한 차례 독대했는데 그것도 이 부총리가 사의를 밝힌 후였다. 이 부총리는 회고록(‘이헌재, 위기를 쏘다’)에서 “DJ는 나를 동지가 아니라 기술자로 발탁했고 끝까지 기술자로 대했다”며 “정책에 대해 한 번도 간섭한 적이 없다”고 적었다. DJ도 “경제전쟁의 장수들은 거의 김종필 총리와 자민련이 추천한 인사들이었지만 그들의 국정 경험을 신뢰했고 그들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했다. 이 부총리는 대기업 구조조정과 빅딜, 금융부실 정리 등 개혁 난제를 풀었다. 그 덕에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관리에서 3년 8개월 만에 벗어났다.
이재명정부는 너무 다르다. 그동안 대통령이 주식·환율부터 부동산, 추경, 농지조사까지 크고 작은 현안마다 정해진 답을 쏟아내고 관료들은 받아쓰기 바빴다. 공개석상에서 장관과 관료를 몰아세우거나 면박을 주는 일도 다반사다. 김용범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대통령이 그렇게 직접 정책을 챙기는데 그 휘몰아치는 일을 어떻게 다 하느냐고 사람들이 신기해한다고 했다. 끝도 좋지 않다. 구윤철 경제부총리가 해외출장길 공항에서 교체통보를 받아 허둥대는가 하면 김 전 실장은 개각 이틀이 지나 갑작스레 물러났다.
지난 1년여간 이어진 경제 실정은 만기친람의 대통령과 눈치 보기에 급급한 경제팀의 잘못된 조합이 화근인 듯하다. 정부는 ‘똘똘한 한 채’를 겨냥한 세제개편안을 내놓다가 여론의 따가운 질책에 후퇴했다. 개편안은 비거주·초고가 1주택자의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를 대폭 올리는 게 핵심이다. 대통령의 입김이 그대로 투영된 것인데 이미 비거주 1주택자 종부세 중과는 번복됐다. 1년 전에도 대주주의 주식 양도세 부과 강화는 주식투자자의 반발로, 상속세율 인하는 부자 감세 논란으로 철회됐다. 2년 내리 세제개편의 알맹이 조치가 엎어지니 정책불신과 시장혼란은 커질 수밖에 없다.
청와대 주도로 졸속 도입한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 사태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 상품은 6·3 지방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출시됐는데 두 달 만에 코스피가 40%나 빠지는 폭락장의 방아쇠를 당겼다. 증권사가 거액의 수수료 수익을 챙기는 사이 개미 계좌는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이러니 민심이 들끓고 지지율도 곤두박질친다.
이 대통령은 차기 경제부총리로 이형일 재경부 1차관을 낙점했다. 이 후보자는 재경부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고 내부 신망도 두텁다고 하니 기대가 크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개각 후 “주택가격 폭락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고 이 후보자는 즉각 “(경매물량 등을)공공주택 용도로 대량매입하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관계부처와 협의하고 있다”고 답했다. 서울 집값은 82주 내리 올랐고 누적 상승률이 17%로 미친 집값 시절인 문재인정부 때보다 2배 이상 웃돈다. 현실과 동떨어진 대통령의 인식도 문제지만 이 지시를 덜컥 받아들이는 이 후보자의 행태는 더 걱정스럽다.
2기 경제팀은 1기 때 겪었던 시행착오와 정책실패를 되풀이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식별하고 정책의 우선순위도 가려야 한다. 집값 대란은 공급확대에 역량을 집중하고 세제와 규제는 시장 상황을 봐가며 뒤따르는 게 순리다. 다른 정책도 시장원리에 부합하는지, 임시방편은 아닌지, 공론화가 필요한지 전후좌우를 꼼꼼히 따져야 탈이 없다.
지금은 DJ식 믿음의 용인술이 필요한 때다. 대통령은 지나친 간섭을 자제하고 관료가 실력을 발휘하도록 판을 깔아줘야 한다. 큰 틀의 국정 방향은 제시하되 정책수단과 실행은 경제팀에 맡기는 게 현명하다. 외풍에 취약한 한국경제는 늘 크고 작은 위기를 겪어왔고 관료의 경험과 집단지성이 난국 타개에 큰 역할을 해왔다. 2기 경제팀마저 흔들리면 경제와 민생뿐 아니라 정권도 벼랑에 몰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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