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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규칼럼] 李·曺, 반걸음씩 물러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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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규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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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 8개월 비운 재제청 갈등
‘선출권력 우위론’은 헌법 오독
사법독립 만능론도 해법은 아냐
협의 관행 되살려 균형 찾아야

‘도대체 어떤 이유로, 어떤 정치체제 아래에서, 전 세계가 53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로마라는 단 하나의 패권 아래 무릎을 꿇게 된 것인가.’

인질이 돼 로마로 끌려온 그리스인 폴리비우스는 이 질문을 붙들고 씨름했다. ‘53년’은 기원전 220년부터 168년까지로, 이탈리아 도시국가 로마가 한니발의 카르타고를 꺾고 마케도니아까지 무너뜨리며 지중해 세계의 패자(覇者)로 올라선 기간이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의 말대로 로마인은 지성에선 그리스인에, 체력에선 켈트·게르만인에, 경제력에선 카르타고인에 뒤졌다. 폴리비우스가 저서 ‘역사’에서 내놓은 로마 융성의 답은 ‘혼합정체(政體)’였다.

조남규 편집인
조남규 편집인

폴리비우스는 왕정과 귀족정, 민주정이 저마다 타락하기 쉽다고 봤다. 왕정은 참주정으로, 귀족정은 과두정으로, 민주정은 중우정으로. 로마는 세 정체의 요소를 각각 담은 집정관과 원로원, 민회가 서로 견제하고 협력한 덕분에 이 악순환을 늦추고 오랜 전성기를 누렸다는 게 폴리비우스의 통찰이었다. 그가 강조한 견제와 균형의 사상은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론으로 이어져 미국 헌법에 새겨졌다. 우리 헌법에도 이식된 삼권분립은 세 발 달린 솥과 같다. 어느 한 발이 길어지거나 짧아지면 솥은 기운다.

폴리비우스의 통찰 이후 2000년도 넘게 지난 지금, 한국에서 그 솥이 기울고 있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퇴임한 노태악 전 대법관의 후임으로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를 제청하자, 이재명 대통령은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지 않고 조 대법원장에게 후보자를 다시 제청(재제청)하라고 요구했다. 이 대통령이 염두에 둔 진보 성향 법관 모임 출신 인사를 제청하라는 메시지로 읽혔다. 국회는 동의권을 행사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솥의 한 발은 땅에 닿지도 못한 셈이다.

재제청 갈등의 이면엔 여권의 ‘선출권력 우위론’이 깔려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임명권력은 선출권력으로부터 2차적으로 권한을 다시 나눠 받은 것”이라며 “대한민국에서는 권력의 서열이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그 인식이 이번 대법관 인사에서 그대로 행동으로 나왔다. 지난주 대법원 국정감사에서는 여당 소속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 “대통령이 대법원장과 같은 수준이라고 보느냐”고 했다. 이런 인식은 헌법을 잘못 읽었거나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파면 결정을 선고했던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도 이 대통령의 선출권력 우위 발언에 “대한민국 헌법 한 번 읽어보시라”고 일침을 놨다.

헌법은 제청권을 대법원장에게, 동의권을 국회에, 임명권을 대통령에게 줬을 뿐이다. 어느 한 곳도 혼자서 대법관을 결정하지 말라는 최고규범의 명령이다. 세 권한 사이에 서열은 없다. 다만 헌법은 이들이 어떻게 협의할지까지 정하지는 않았다. 그 공백은 대화와 타협으로 메워야 한다.

선출권력 우위론에 맞서 조 대법원장은 “국회와 대통령은 대법원장의 (대법관 후보자) 제청에 전혀 관여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대법원장이 협의를 안 해도 헌법상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도 했다. 조문 뒤에 숨어 헌법의 빈자리를 방치하는 무책임 아닌가.

한쪽은 선출권력 우위를 내세워 압박하고, 다른 한쪽은 사법권 독립 원칙만 되뇐다. 역대 대통령과 대법원장이 ‘협의’를 통해 헌법의 공백을 메워 온 이유를 이 대통령과 조 대법원장 모두 성찰해야 한다. 폴리비우스식으로 말하면, 권력의 한 축이 다른 축을 압도하려는 순간 혼합정체의 균형은 무너지고 타락이 시작된다.

대통령과 대법원장의 다툼 탓에 대법관 한 자리가 8개월째 비어 있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올해 대법원 형사사건 상고심 처리 기간은 한 달 가까이 늘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이다. 이쯤에서 두 사람은 반걸음씩 물러서야 한다. 국민의 편익만 생각하면 해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조 대법원장은 손 후보자 제청을 철회하고,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를 새로 꾸리되 제청에 앞서 대통령과 충분히 협의하는 관행을 되살리길 바란다. 이 대통령은 특정 후보를 염두에 둔 재제청 요구를 거두고, 새로 제청된 후보의 임명동의안은 지체 없이 국회에 보내겠다고 약속하면 어떤가. 협의는 의견을 나누는 자리일 뿐, 어느 한쪽이 후보를 고르는 자리가 돼선 안 된다. 솥이 뒤집혀 국이 쏟아지기 전에 균형을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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