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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서제는 공신이나 고위관리의 자손을 관리로 채용하는 제도다. 음서(蔭敍)를 문음(門蔭)·음사(蔭仕)·음직(蔭職)이라고도 했다. 임금이 큰 공을 세운 신하의 자손에게 관직을 준 사례는 삼국시대에도 찾아볼 수 있지만, 음서제가 제도로 자리 잡은 것은 고려 성종 때다. 최승로가 성종에게 올린 시무책에서 “여러 차례 내리신 은혜롭고 너그러운 교지에 의거해 공신의 등급에 따라 그 자손을 등용할 것”을 요구했다. 공신 숙청과 과거제 도입에 대한 반발이다. 그 후 5품 이상 고위관료의 자손에게 음직을 제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시대에는 음서제가 과거제와 더불어 가장 보편적인 관리등용 방식이었다. 학계는 음서 출신 관리 수가 과거급제자보다 많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음서 출신은 어린 나이에 관리가 돼 대부분 5품 이상으로 승진했고 이 중 절반가량은 재상 지위에 올랐다고 한다. 고려의 문벌귀족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조선시대에도 음서제가 이어졌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장상(將相)과 대신(大臣)은 모두 백성에게 공덕이 있고, 또 그들의 자손은 가훈을 이어받아서 예의를 잘 알고 있으므로 모두 벼슬을 할 만하다고 생각해 문음제를 두었다”고 했다. 음서제의 취지를 잘 설명한 구절로 꼽힌다.

다만 조선에서 음직은 3품 이상 관리의 자손에게 임시적 직무를 맡기는 것으로 제한됐다. 음서를 남행(南行)이라고도 했는데, 임금 앞에서 조회할 때 문관은 동쪽에, 무관은 서쪽에 섰고 음관은 남쪽에 섰기 때문이다. 아전과 동류로 취급됐다고 한다. 음서로 고위직에 오른 사례도 거의 없다. 한명회는 문음으로 경덕궁을 지키는 궁직으로 나갔다가 권력 정점에 오른 드문 사례다. 세조 집권을 도와 정난공신이 되고 두 딸을 왕비로 들여보낸 뒤 영의정을 지냈다. 공신이어서 가능한 일이다. 음서제는 조선 중기의 사림정치 때 음서 출신의 지위가 약화되는 등 부침을 거듭하다 고종 때 공식 폐지됐다.

요즘 현대판 음서제 얘기가 많다. 고용노동부가 지난 3월 전국 사업장 2076곳을 조사한 결과 전체 단체협약 중 25.1%가 조합원 가족을 특별·우선 채용하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나타나 시정 명령을 내린 바 있다. 대규모 구조조정 태풍권에 들어선 조선업계에서 대우조선해양과 현대중공업이 노조 측에 직원 자녀 우선 채용 조항 삭제를 요구했다. 과거 조선업 호황기에 인력난에 시달리다 채용 대가로 자녀를 뽑아주겠다고 약속한 결과 이처럼 불합리한 단협 조항이 생겼다고 한다. 이제는 사라져야 할 구습이다. 청년층 실업자가 48만여명에 달하는 세상이다.

박완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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