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열정 이어받은 제자들, 더 발전시켜
필자가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李秉岐)를 언제 알았을까. 그것은 중학생 시절 국어책에서 시조 ‘박연폭포’를 접해서였을까, 아니면 고등학교 국어책에 실린 ‘난초’였을까. 그러나 무엇보다 이병기가 필자의 뇌리에 박힌 계기는 시조 ‘별’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시조 ‘별’이 작곡가 이수인에 의해 가곡으로 재탄생하면서 누구나 읊조리는 국민시조이자 국민가곡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수인은 평소에 이 ‘별’을 애송했던지라 1965년 어느 날 단숨에 가곡으로 승화시켰다.
또한 필자가 군산대 전임강사 시절 국문학과 모 교수가 알려준 그의 시조 ‘군산항’으로 다시금 다가왔다. 이 시조는 한글 강습차 군산을 자주 방문한 가람이 군산항에 쌓여 있는 미곡과 해산물을 바라보면서 일제의 경제수탈을 넌지시 비판한 시조이다. ‘별’의 분위기와 너무 달라 처음에는 가람의 시조인가 의아해했다.
가람은 1968년 11월29일 전라북도 익산군 여산면에서 향년 78세로 작고하였다. 그는 무엇보다 일제의 엄혹한 지배와 좌우익의 극심한 갈등, 그리고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을 거치면서도 자신이 태어난 여산 생가에서 별세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행운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시조를 연 장본인이자 온갖 고전들을 발굴하고 연구하였다는 명성에도 개인으로서는 결코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다.
‘가람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제자에 대한 각별한 관심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그중 가람과 김삼불(金三不) 사이에서 일어났던 에피소드는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김삼불은 1938년 윤동주와 더불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정인보, 최현배, 손진태 등으로부터 민족의 유산인 국학을 배웠고 1946년 서울대에 진학하여 가람 문하에서 판소리의 집대성자 신재효를 주제로 삼아 학부 논문을 작성했다. 이때 심사위원은 지도교수 가람은 물론 이희승과 이숭녕이었다. 2015년 서울대학교 기록관 전시회에서 논문 초고를 보면서 오늘날 석사학위 이상으로 비칠 정도로 분량이 대단했으며, 내용도 설화-판소리-판소리계 소설이라는 통설을 처음 세울 정도로,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가 부산스러운 해방정국임을 감안할 때 어떻게 이런 명작이 나왔는지 신기할 뿐이다. 지도교수의 엄격하고도 자상한 가르침은 물론 본인의 천재성과 부지런함이 뒷받침된 결과이다. 그러면서도 가람은 김삼불에 대한 안타까움을 일기 곳곳에 남겼다. “퍽 근신하고 공부에나 열중한 사람이 왜 그런데 들었던고. 한 액(厄)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당시 김삼불이 판소리연구에 매진하면서도 좌익활동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람의 제자들에 대한 사랑은 식을 줄 몰라 전북대로 옮긴 뒤에도 지속되었다. 어떤 제자는 강의실보다 전주 시내의 조그마한 주점에서 펼친 강의가 명강의였다고 회고했다. 어쩌면 가람은 강의를 하면서 스승 주시경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국학은 꺼질 듯 말 듯 하면서도 이러한 선각자들의 헌신과 열정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다시 제자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연암 박지원이 외친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 할까. 그리고 그가 발굴하고 남긴 많은 자료 덕분에 후학들은 국학 연구에 매진하며 공든 탑들을 쌓아가고 있다. 그는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게 살다가 돌아가신 청초한 사표였다.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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