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동북아 안정 위해 소통의 틀 유지해야
2월 8일,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이끄는 여권이 거둔 압승은 일본 유권자들의 ‘변화에 대한 요구’가 선거 결과로 명확하게 표출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보수 정치의 강화나 이념적 선택이라기보다, 장기 침체와 불확실성 속에서 실질적인 국정 운영 능력과 안정적 리더십을 요구한 민심의 반영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선거 과정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기존의 강경한 이미지와 달리 보수·우익적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헌법 개정이나 역사 인식과 같은 민감한 의제는 선거 쟁점의 중심에서 비켜섰고, 대신 물가 대응, 성장 전략, 산업 경쟁력 강화 등 경제정책이 주요 화두로 제시되었다. 이는 일본 유권자들이 현재 가장 절실하게 체감하는 과제가 ‘이념의 방향’보다 ‘먹고사는 문제’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같은 전략은 결과적으로 유권자들의 불안과 피로감을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 고물가와 엔화 약세, 인구 감소와 지방 침체라는 구조적 문제 앞에서, 일본 사회는 더 이상 안정보다는 변화를 이끌 정책을 원하고 있다. 다카이치 내각은 이러한 분위기를 정확히 읽었고, ‘이데올로기적 메시지’보다는 ‘책임’과 ‘전진’을 내세우는 선거를 치렀다. 다카이치 총리라면 현재의 어려움을 타개하고, 일본인들의 생활을 지켜주고, 일본이라는 나라를 지켜줄 것이라는 기대심리가 반영되었다.
그러나 이번 압승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한 정책 조정에 그치지 않는다. 정치적 여건을 감안할 때, 다카이치 총리는 주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조건을 상당 부분 갖추게 되었다. 안정적인 의석 구조와 여권 내 결속은 경제뿐 아니라 안보·외교 영역에서도 정책 선택의 재량을 확대시키고 있다. 선거 과정에서 자제했던 의제들이 향후 국정 운영 과정에서 단계적으로 부상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동북아 안보 질서와 관련해 일본의 역할 확대는 불가피한 흐름으로 보인다. 대만해협의 긴장 지속, 중국의 군사력 증강,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는 일본이 더 이상 수동적인 안보 행위자로 머무르기 어려운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미·일 동맹을 기반으로 억지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한·미·일 안보협력의 실질화를 통해 역내 안정에 기여하려는 노선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이번 선거 결과는 일본 사회가 ‘군사적 과시’보다는 ‘관리된 책임 확대’를 선호하고 있고, 이는 미·일 동맹과 한·미·일 협력의 틀 속에서 점진적이고 제도화된 방식으로 안보 역할을 강화하려는 접근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주목할 점은 일본 정부가 이러한 역할 확대를 단순히 동맹의 요구나 외부 압력의 결과로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일본 방위대신을 통해 반복적으로 발신되고 있는 메시지는, 일본의 안보 판단과 대응은 일본 스스로의 결정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는 일본이 동맹과 협력하되, 안보 정책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일본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신호로 읽힌다. 동맹 의존에서 벗어나 보다 자율적인 전략 행위자로 자리매김하려는 흐름이 점차 명확해지고 있는 것이다.
다카이치 내각이 역내 안보에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되, 불필요한 긴장을 증폭시키지 않으며, 억지력 강화와 위기관리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지가 향후 동북아 안정의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여기에 2027년 자민당 총재 선거와 2028년 참의원 선거라는 정치 일정도 변수로 작용한다. 중의원 선거 압승으로 확보한 정치적 자산을 경제 성과와 안보 안정이라는 가시적 결과로 연결하지 못할 경우, 유권자들의 기대는 빠르게 흔들릴 수 있다. 반대로 성과가 축적된다면 일본의 정책 노선은 보다 일관되고 지속적인 방향성을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 주는 시사점 역시 분명하다. 일본의 정치적 안정과 안보 역할 확대는 협력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동시에, 갈등 사안 발생 시 일본이 보다 명확한 입장을 취할 가능성도 내포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일본의 역할 확대가 동북아의 안정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도록, 관리와 소통의 틀을 유지하는 것이다.
2026년 중의원 선거 이후 일본은 선택의 폭을 넓혔다. 그 선택이 역내 안정으로 이어질지, 새로운 긴장의 축적으로 귀결될지는 일본 스스로의 판단과 책임 있는 행보에 달려 있다. 다카이치 총리 체제의 진정한 시험대는 이제부터 시작되고 있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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