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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한국 외교의 ‘와일드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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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욱 외교안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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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유럽의 한 국가에서 전직 고위 외교관과 식사를 했다. 퇴임한 지 오래지만 여전히 1년의 절반 가까이를 해외에서 보낸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을 꼽았다. 기존 외교 문법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대통령이 등장한 만큼 대미 외교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고, 자신이 현직에서 쌓은 경험, 인맥을 활용할 여지가 커졌다고 했다. 러시아가 지난 7월 1962년생인 안드레이 포델리셰프를 신임 주북한대사로 임명한 것도 비슷한 맥락을 가진다. 우리 기준이라면 정년을 넘겼을 나이에 신임 대사로 평양에 부임한 것이다.

이런 사례들을 보며 한국 외교를 떠올렸다. 대사나 총영사급 외교관 한 명을 길러내는 데는 최소 20여년이 걸린다. 세계 각국에서 협상 경험과 인맥을 쌓지만 전문성이 무르익을 무렵인 만 60세를 전후해 상당수가 현장을 떠난다. 외교의 영역은 4강(미·중·일·러)과 북한을 넘어 중동과 중앙아시아, 중남미까지 지평이 확대되고, 경제안보와 공급망, 인공지능(AI)까지 주요 현안이 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인적 자산의 포기나 마찬가지다.

김태욱 외교안보부 기자
김태욱 외교안보부 기자

당장 한·미 관계부터 녹록지 않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대통령이라고 임기가 끝날 때까지 참고 견딜 수만은 없다. 누구든 만나고 설득해 국익을 관철하는 것이 외교다. 백악관과 행정부, 의회에 오랜 인맥을 쌓은 전직 외교관들도 국가 차원에서 활용해야 한다.

호르무즈해협 문제도 미국의 요구에 어떻게 대응할지만 고민해서는 안 된다. 해협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란 정권 핵심부와 얼마나 긴밀한 소통 채널을 갖고 있는지도 들여다봐야 한다.

미국은 축적된 외교 경험을 활용하는 생태계가 우리보다 촘촘하다. 미국외교협회(CFR)에는 국무부와 백악관을 거친 고위 관료들이 공직을 떠난 뒤에도 연구와 정책 제언을 이어간다. 1997∼2001년 국무부 소련 담당 특명대사를 지낸 스티븐 세스타노비치 전 대사는 현재 CFR 러시아·유라시아 담당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외교아카데미(AAD) 창립회원인 해럴드 손더스(1930∼2016)도 대표적인 인물이다. 국무부 차관보를 지낸 그는 헨리 키신저의 중동 셔틀외교와 캠프데이비드 협상, 주이란 미국대사관 인질사태 해결에 참여했다. 퇴임 후에는 미·소 간 비공식 대화인 ‘다트머스 회의’를 이끌며 ‘트랙1’에서 민간의 ‘트랙2’로 무대를 옮겨 외교를 이어갔다.

우리에게도 전·현직 외교관 약 2000명으로 구성된 공익목적의 비영리 사단법인 ‘한국외교협회’가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전직 외교부 직원들의 친목과 교류 성격이 강했다. 이제는 역할을 넓힐 때다. 전직 외교관들이 CFR과 AAD처럼 국제 현안을 분석해 정책을 제언하고, 현직이 공식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상대와는 민간에서 대화의 끈을 잇는 것이다. 특히 공식 대화가 막힌 북한에서 이런 역할은 더 절실하다. 김정은 독재 체제라고 해도 그 아래에는 정권을 움직이는 수많은 인사가 있다. 이들과 오랫동안 접촉하며 대북 네트워크를 쌓아온 우리 인사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현장 밖에 세워둔 채 어떻게 남북관계의 ‘페이스메이커’가 되겠다고 할 수 있을까.

미국을 상대할 사람이면 대미 네트워크를, 북한을 상대할 사람이면 대북 네트워크를 봐야 한다. 나이나 어느 정부에서 일했는지는 그다음이다. 올림픽 축구에도 연령 제한을 넘어 선수를 기용하는 ‘와일드카드’가 있다. 외교도 다르지 않다. 수십년에 걸쳐 쌓은 경험과 네트워크를 나이 때문에 떠나보낼 이유가 없다. 지금 한국 외교에도 ‘와일드카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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