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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의감성엽서] 에밀리 디킨슨을 읽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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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11-18 23:16:43 수정 : 2025-11-18 23: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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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차게 내리던 소나기가 그치고 무지개가 떴어. 나는 무지개를 더 잘 보기 위해 쏜살같이 들판으로 달려나갔어. 그러다 발을 헛디뎌 깊은 진흙탕에 빠지고 말았어. 바둥바둥 허우적대면서도 무지개를 봐야 한다는 일념에 온 힘을 다해 진흙탕을 겨우 빠져나왔는데…. 아뿔싸! 신발을 그만 진흙탕에게 빼앗기고 말았어. 다시 들어가 신발을 찾을 수도 없어 나는 그 앞에 그대로 주저앉아 들판 끝에 아름답게 걸려 있는 무지개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어. 어찌나 예쁘고 황홀하던지. 신발 잃은 것도 잊고, 한참을 바라보았어. 빨주노초파남보, 그 색깔들이 모두 나를 향해 환하게 웃는 것 같았어.

아주 어릴 때의 일이야. 지금도 무지개를 볼 때마다 그때 일이 생각나 혼자 킥킥 웃을 때가 많아. 그때 잃어버린 내 고무신과 눈부시게 강렬했던 무지개색과 온몸이 진흙투성이에다 눈물 콧물로 범벅된 내 몰골을 보고도 혼내지 않고 맨발로 달려 나와 우선 목욕부터 하고 새 신발을 사러 가자던 무지개만큼 예뻤던 우리 엄마.

그런데 오늘 에밀리 디킨슨의 글에서 “나는 어렸을 때 두 가지를 잃어버렸어. 하나는 진흙 속에 빠진 신발, 진홍 로벨리아를 찾아 헤매다 맨발로 집에 돌아왔어. 그리고 어머니의 꾸지람.” 부분을 발견하고는 나도 모르게 하하하! 웃었어. 에밀리 디킨슨도 어렸을 땐 나처럼 온 들판을 헤매다니는 들판의 아이였나 봐. 그녀도 내가 무지개를 잡으려고 들판을 내달렸듯이 새빨간 로벨리아꽃을 찾아 헤매다 진흙탕에 빠졌었나 봐. 진흙탕에 신발을 잃어버리면 정말 찾기 힘들지. 찾다 찾다 결국 못 찾고 돌아올 때의 그 두려움을 나는 알지. 요즘 아이들은 절대 모를 그 두려움. 그래도 그 두려움 한편엔 새 신발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묘한 기쁨이 숨어 있었지. 하여 어떤 야단을 들어도 얼마든지 눈물 뚝뚝 흘리며 참을 수 있지. 진흙탕에서 빠져나오려 무지 노력한 탓에 잠도 쿨쿨 잘 오고, 내일이면 새 신발을 신고 다닐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는 묘한 쾌감.

그런 일을 아주 옛날 에밀리 디킨슨도 겪었다니, 그녀가 어제보다 더 좋아지네.

하지만 오늘은 그녀가 찾아 헤매다녔다는 새빨간 로벨리아꽃보다 그녀가 무척 좋아했다는, 제 인생의 꽃이라고 말했던 ‘인디언 파이프’에 더 관심이 가네. 양초처럼 새하얗고 투명한, 약간 튤립을 닮은 듯하나 잎도 없고 엽록소도 없어 스스로 광합성을 하지 않는 꽃. 주로 어두운 숲속이나 낙엽 많은 토양에서 자라는 꽃. 곰팡이류(균근)와 공생하며 영양분을 얻지만 절대 버섯이 아닌 관속식물(속씨식물)로 다년생 야생화인 신비하고 몽환적인 꽃. 유령식물 혹은 저승의 꽃이라 불리는 수정란풀. 그녀 사후에 나온 첫 시집 표지를 장식했던 꽃, 인디언 파이프. 묘하게 그 꽃이 진흙 속의 진주처럼 내 눈을 사로잡네. 에밀리 디킨슨처럼 희귀종인 그 꽃이!


김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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