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대통령·다카이치 내일 회담
中의 ‘한·일 갈라치기’ 견제 속
국익 중심 실용외교 본격 시험대
“사무라이들이 한 손에는 서양 책을 쥐고 반세기 만에 근대국가의 기반을 구축했다.”
일본이 나가사키현 하시마 탄광(일명 군함도) 등 강제노역 시설 7곳이 포함된 23개 근대 산업시설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만든 도쿄 신주쿠구 산업유산정보센터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극비리에 떠난 영국 유학을 통해 서구 선진 지식을 익히고 돌아와 아시아의 첫 근대화를 이끈 메이지유신 주역들을 추켜세우는 표현이다.
일본의 근대화는 1853년 에도만(현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우라가)에 나타난 미국 구로부네(黑船·흑선) 함대의 개항 요구에서 비롯됐다. 증기선을 처음 본 일본인들은 흑선을 ‘연기를 내뿜는 용’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에도 막부는 페리 제독의 압박에 굴복해 200년 쇄국 정책을 포기한다.
당시 충격이 컸던지 일본에서는 지금도 흑선이 서방 문물·세력의 상륙·압박을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10년 전 일본에 진출해 방송 시장을 뒤흔든 넷플릭스도, 비슷한 시기 처음 당선돼 과거와 전혀 다른 미국을 선보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흑선에 비견됐다.
지난해에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폭격이 종종 흑선으로 묘사됐다. 일본 경제의 핵심축인 자동차 산업계에서만 하루 30억엔(약 277억원)의 손실이 발생해 당시 이시바 시게루 내각이 ‘국난’에 견줄 정도로 위기감을 내비쳤으니 그리 과장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동맹국들에 국방비를 인상하라고 으름장을 놓고 관세로 압박하던 미국 대통령은 이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국 덴마크의 영토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전후 국제 평화·협력을 목적으로 창설된 유엔의 산하기구 31곳에서 탈퇴도 선언했다. 새해 벽두부터 타국 영토에서 군사 작전을 벌여 해당국 정상을 나포해오기도 한다.
그런 미국에 대항하는 중국은 어떠한가.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대만 유사시 무력 개입’ 시사 발언 이후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표출하는 중이다. 여행·유학 자제 권고로 시작한 일본 압박은 영화 개봉 연기 및 가수 공연 중단 등 문화 분야로, 수산물 수입 중단 재개 등 무역 분야로, 자위대 항공기에 대한 레이더 조준 등 군사 분야로 점점 확산했다. 급기야 ‘첨단산업의 심장’이라 불리는 희토류 공급까지 조일 태세다.
4년 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폭발한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이 이제 전방위적으로 펼쳐지려 하고 있다. 트황상(트럼프 대통령)과 시황제(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21세기 차르(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의해 영토 불가침, 주권 존중, 자유무역이라는 전후 세계질서의 핵심 원칙들이 흔들리고 있다. 새로운 흑선들이 곳곳에서 출몰하는 형국이다.
이런 세계사적 격변에선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으로부터는 일본과 똑같이 관세를 얻어맞았다. 한·중·일 공급망이 얽혀 있는 이상 중국의 희토류 규제로 일본의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면 국내 산업에도 피해가 올 가능성이 있다.
중·일 관계 악화는 한국이 원하는 이른바 ‘한한령’(限韓令) 완화에도 변수다. 최근 일본 내 반중 정서가 고조되며 K팝 그룹 에스파의 중국인 멤버 닝닝에 대한 NHK 홍백가합전 출연 반대 운동이 벌어졌듯, 나중에 K팝 중국 공연이 재개되더라도 멤버 국적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지난달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KBS 뮤직뱅크 재팬 출연진 중 일본인이 29명에 달할 정도로 K팝 그룹의 멤버 구성은 다양해진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13일 다카이치 총리 고향인 일본 나라를 찾는다. 취임 일곱 달 만에 벌써 다섯 번째 한·일 정상회담이다. 양국이 과거사라는 민감한 문제를 안고 있지만, 가까운 이웃이자 엄중한 대외 환경 속 비슷한 처지에 놓인 나라로서 협력을 통해 활로를 찾자는 의지가 느껴진다. 하지만 불과 며칠 전 시 주석이 이 대통령에게 “역사의 올바른 편에 서야 한다”고 주문하자마자 대일본 희토류 규제 카드를 꺼낸 데서 보듯 중국은 ‘한·일 갈라치기’를 노골화하고 있다. 중·일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점을 찾을지 이 대통령의 ‘국익 중심 실용외교’가 본격 시험대에 오른 모양새다.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왕설래] 전업자녀](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1/11/128/20260111509892.jpg
)
![[특파원리포트] 21세기 ‘흑선’ 함대에 마주선 한·일](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1/11/128/20260111509858.jpg
)
![[박영준 칼럼] 美 국방전략 변화와 한·미 동맹 과제](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1/11/128/20260111509810.jpg
)
![[심호섭의전쟁이야기] 과감한 결단이 얻어낸 ‘전장의 운’](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1/11/128/20260111509814.jpg
)








